‘인민유격대’는 남·북 노동당이 공식적으로 합당을 결정한 후인 1949년 7월에 조직되었다. 인민유격대가 조직된 것은 이전까지 남한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유격투쟁’을 조직적이며 좀더 대규모로 운영하기 위한…
‘인민유격대’는 남·북 노동당이 공식적으로 합당을 결정한 후인 1949년 7월에 조직되었다. 인민유격대가 조직된 것은 이전까지 남한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유격투쟁’을 조직적이며 좀더 대규모로 운영하기 위한…
정부 수립 이후 남로당은 투쟁전술을 무장유격투쟁으로 전환하고 1949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무력투쟁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남로당의 노선변화는 남한내의 각종 좌익사건을 계기로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입법되고,…
대대적인 숙군 작업은 1949년 7월에 일단 막을 내렸다. 이 시기까지 숙군의 결과 총 4,749명의 장병들이 처벌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군 병력의 약 5%에 해당하는…
1948년 6월 18일 제주도 주둔 제11연대 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암살사건은 숙군의 단초가 되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국방경비대에서는 전군 차원의 사상검열을 실시했다. 1948년 8월 16일자…
국방경비대 창설 당시 미군정청 군사국(軍事局) 차장 아고(Reamer Argo) 대령은 군사국 고문이었던 이응준의 신원조사 제안에도 불구하고 군내의 파벌 경계와 정보기구의 활용 등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그…
제3차 반란은 포항 교외 조천비행장 경비를 맡고 있던 제4중대(중대장 이영삼 중위)가 원대 복귀 명령을 받고 임무 교대를 위해 잔무를 정리하고 있던 1949년 1월 30일에…
제1차 사건을 계기로 연대본부와 제2, 제3대대는 숙군이 진행되었지만 지리산지구에 출동중인 연대 하사관교육대와 제1대대의 2개 중대에는 아직 숙군 작업이 미치지 못했다. 이에 숙군당국(肅軍當局)에서는 토벌부대도 일단…
대구 주둔 제6연대는 창설이래 5명의 연대장 가운데 김종석, 최남근 등 2명이 좌익 관련 장교였으며, 사병들 또한 소위 ‘대구폭동사건(1946. 10. 1)’의 관련자들이 대거 도피처로 삼아…
1948년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를 탈환함으로써 사건 9일만에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지만 상당수의 반란군 잔여병력이 지리산 일대로 도주하여 게릴라 활동을 위한 근거지를 형성하였다. 이에 육군총사령부는…
제14연대의 반란 소식이 육군총사령부에 전달된 것은 20일 01 : 00가 넘어서였다. 철도경찰대의 경비 전화망을 통해 올라온 반란의 급보를 접한 이범석 국방장관은 09 : 00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