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경비대 창설 당시 미군정청 군사국(軍事局) 차장 아고(Reamer Argo) 대령은 군사국 고문이었던 이응준의 신원조사 제안에도 불구하고 군내의 파벌 경계와 정보기구의 활용 등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그 결과 각 연대별로 진행된 모병과정에서 좌익계 사설군사단체에서 활동하던 자들이 대거 입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부산 제5연대의 경우, 국군준비대 부산지대 부위원장 오덕준(吳德俊)이 장교로 임관할 때 그의 부하들도 사병으로 입대하였으며, 대구 제6연대에서는 국군준비대 경북지부 간부였던 하재팔(河在八)이 창설 요원으로 부임하면서 과거 그의 부하들도 함께 입대하였다. 이밖에도 경찰의 수배나 탄압을 피해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1946년 ‘대구 10월 폭동’ 이후 대구 제6연대에는 경비대를 은신처로 생각한 수배자들이 대거 입대했다.
미군정은 ‘불편부당․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국방경비대원들의 정치참여를 제한하고 그들에게 국내 치안확보에 전력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은 좌·우의 대립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한국인들이 정부보다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에 충성하기 때문에 강력한 군대조직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인식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군대 창설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한국인들의 정치이념을 변형시키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치적 중립과 불편부당’이 군대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불편부당·정치적 중립’과는 상반되게 좌익 성향의 세력들이 국방경비대에 참여하였다. 제1연대 장교였던 이병주(李炳冑), 이상진(李尙振)을 비롯한 제1연대 대원들은 공산주의자 회합에 참가하고 있었으며, 인민당의 김세용(金世鎔)도 국방경비대내에 자신의 조직을 만들고 있었다.
1947년 9월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미군정은 국방경비대에서 각종 사건을 일으키는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숙군을 전개했다. 이미 이전부터 미군 방첩대는 남로당의 국방경비대 침투를 감시하고 있었다. 미군정 방첩대에서는 각 지역 지부에 담당 지역의 국방경비대와 남로당과의 관계를 감시하고, 국방경비대의 좌익 수(數)와 범위를 측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국방경비대에서 좌익 세력이 확대되면 좌익에 의한 소위 ‘혁명적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국방경비대를 동원할 수 없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1947년 10월 송호성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은 군내의 사상문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금 남조선 상태로 봐선 어느 기관에든지 그거 없는 데는 없을 줄 내 안단 말야. 경비대에라구 내 부인 못하지요. 허나 덮어놓고 그거라고 모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단 말야. 장삼이사(張三李四)하지 말구선 어디에 어떤 놈이라고 꼬집어보란 말야. 그렇지는 못하구서 그걸 보는 것은 사람을 그걸루 맨드는 거나 다름없단 말야.”
이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국방경비대내에서는 ‘공산주의자의 추방’, 나아가 5·10총선거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제거한다는 대의명분 하에 대대적인 군내 좌익 세력 척결을 진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