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를 탈환함으로써 사건 9일만에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지만 상당수의 반란군 잔여병력이 지리산 일대로 도주하여 게릴라 활동을 위한 근거지를 형성하였다. 이에 육군총사령부는 10월 30일 여수에 있던 반란군 토벌사령부 예하의 작전부대를 주축으로 하여 호남방면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는 한편 전투지구를 남과 북으로 분할하였다. 북지구전투사령부(北地區戰鬪司令部)는 남원에 사령부를 두고 제2여단장인 원용덕 대령의 지휘하에 제2연대와 제3연대, 그리고 제6연대의 1개 대대 및 제15연대의 1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지구전투사령부(南地區戰鬪司令部)는 순천에 사령부를 두고 제5여단장 김백일 중령의 지휘하에 제4연대와 제12연대의 2개 대대 및 제15연대의 1개 대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당시 남·북지구전투사령부의 전투지경선은 섬진강-구례-압록-삼지-담양-고창을 연하는 선에 결정되었다.

호남방면전투사령부 편성
지리산지구 게릴라 토벌작전 개념은 소위 4F전술, 즉 ‘찾아서-고정시킨 후-싸워서-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것이었으며, 작전은 제12연대가 주축이 되었다. 제12연대는 순천를 경유해 구례로 이동하여 반란군 주력인 김지회 부대를 포위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0월 29일부터 11월 1일까지 진행된 제12연대 제2대대와 제3대대의 반란군 토벌작전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부대 정비를 위해 11월 1일 군산 원대로 복귀하였다. 그 대신 군산에 잔류하던 제1대대(대대장 허암 대위)가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의 지휘하에 구례로 이동하여 반란군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11월 4일 북부지구사령관 원용덕 대령이 소집한 지휘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남원으로 향하던 백인기 연대장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은 헌병 1개 분대와 함께 15 : 30에 구례에서 남원으로 출발하였는데, 16 : 00경 구례 동북방 15㎞ 지점에 위치한 산동지서 부근에서 반란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으로 헌병들이 죽거나 모두 도망쳐버려 연대장 혼자 남게 되자 백인기 중령은 한 농가에서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백인기 중령 일행이 반란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 것은 통신시설을 반란군들이 점거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원사령부에서는 구례경찰서를 경유해서 제12연대에 작전회의 소집을 전달하였는데, 산동지서를 점령하고 있던 반군들이 이 사실을 도청했던 것이다.

백인기 제12연대장 등 전몰 장병의 영령 11위가 군산시에 있는 제12연대 본부로 옮겨지고 있다.
이에 따라 11월 5일부터 부연대장 백인엽 소령이 연대장 대리로서 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부연대장이 구례에 도착하였을 무렵에 제12연대는 김지회 부대로부터 3일 동안 피습을 받아 많은 손실을 입고 장병들의 사기도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11월 8일 04 : 00경 김지회 부대 주력이 야음을 틈타 구례초등학교 앞산인 봉성산(170m)에 배치된 1개 중대(중대장 이동호 중위)를 기습한 후 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제12연대 본부를 포위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반란군의 기습공격을 받자 부연대장은 약간 당황하였지만 반란군들의 사격술이 미숙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중화기중대장 송호림 중위로 하여금 81㎜ 박격포 8문으로 봉성산에 화력을 집중하게 하는 한편 각 소총중대를 진두지휘하여 반격을 감행했다. 반란군들은 박격포의 집중사격과 각 중대의 공격이 강화되자 05 : 00경 일제히 퇴각하였다. 제12연대의 강력한 반격작전으로 반란군은 40여명의 피해를 내고 도주하였다.
구례 기습작전에서 실패한 김지회 부대는 지리산으로 퇴각하여 입산 후 전술을 장기항전으로 바꾸고 병력을 분산시켰다. 즉 일부는 백운산에 근거지를 정하였고, 일부는 태석봉․둔철산․정수산․감악산 일대에, 나머지는 달궁·장안산·덕유산·천마산·칠봉·삼도봉을 연하여 유격근거지를 형성하였다. 반란군들은 근거지를 전전하면서 구례, 곡성, 광양, 무주, 장수, 남원, 거창, 산청, 함양, 진주, 하동 등지에 출몰하여 관공서습격, 방화, 약탈, 살해, 납치 등의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전남·북과 경남 일부지역에 불안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 지역의 민간인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치하에 살고 밤에는 반란군들의 치하에서 생활하는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1948년 10월 30일 남북지구로 분할하여 반란군 토벌작전을 지휘하던 호남방면 전투사령부는 1949년 3월 1일 호남지구전투사령부와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로 강화되었다. 광주에 사령부를 둔 호남지구전투사령부는 사령관에 원용덕 준장이 임명되었으며, 예하에 제20연대, 제15연대 1개 대대, 제3연대 1개 대대를 배속하였다.

호남지구전투사령부 편성
남원에 사령부를 둔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는 사령관에 정일권 준장이 임명되었으며, 예하에 제3연대 1개 대대, 제5연대 1개 대대, 제9연대 1개 대대, 제19연대 1개 대대, 독립유격대대를 배속하였다.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 편성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는 반란군 소탕작전을 3단계로 구분하여 실시했다. 제1단계로 사령부는 3월 초순 작전부대를 남원·구례·화개장·하동·진주·산청지역에 분산 배치하고 1주일간에 걸쳐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은 산악지역의 추위를 피하거나 식량을 획득하기 위해 야산지대로 하산한 반란군들을 지리산으로 쫓아 올리는데 목적을 두고, 야산 주변의 수색작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 작전기간 중에는 소규모의 접전밖에 없었지만 화개장 전투에서 제9연대 제3대대가 김지회 부대로부터 기습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의 제2단계 작전은 1949년 3월 11일부터 전개한 작전으로 야산지대에 산재한 반란군들을 지리산 일대로 몰아넣은 다음 이들을 격멸한다는 작전개념이었다. 작전부대는 노고단․반야봉․천왕봉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리산맥의 남과 북을 순차적으로 이동하면서 반란군의 은거지를 집중 수색하였다. 이에 따라 반란군들은 근거지를 버리고 분산하여 함양․안의․거창지역으로 도주하였다. 진압부대는 이들을 추격해 북상하였으나 접촉하지 못한 채 작전을 종결지었다.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과 참모일동
제3단계 작전은 3월 16일부터 실시되었다. 진압부대는 거창·함양 등지로 이동하여 반란군의 색출, 소탕하는데 중점을 둔 작전을 전개했다. 지리산 북동쪽 40㎞ 지점의 거창에 진압부대의 거점을 둔 제3연대 제3대대(대대장 한웅진 대위)는 매일같이 산청․안의․위천 방면에 병력을 투입하여 수색을 반복하였다. 대대장은 수시로 대대병력을 한 지역에 집중 투입하여 탐색활동을 계속하기도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타지역을 담당한 대대 또한 이와 엇비슷한 정황 속에서 작전행동을 계속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편, 김지회와 홍순석은 3월 21일 지리산에 은거하던 게릴라 500여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이동하였다. 그 중의 일부병력이 경남 거창군 북상면 황점부락을 점령하였으며, 22일에는 목재운반 차량 2대를 강탈하였다. 이들 중 60명은 국군으로 가장하고 강탈한 트럭 2대를 이용해 24일 위천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들을 감금하고 거창으로 진출하기 위해 거창 경찰서장과 전화통화를 시도하는 대담성도 보였다. 홍순석은 “우리는 국군 제3연대의 선발병력이다. 지금 덕유산의 반란군 토벌을 마치고 거창으로 이동 중에 있다. 현재 우리는 위천지서에 있는데 주력부대 500명이 거창에 들어갈 것이니 식사와 숙소를 1시간 안으로 준비하고, 차량 8대를 징발하여 20분 내로 위천에 보내라. 그리고 차량인솔은 경찰서장이 직접 하라”고 명령조로 요구하였다.
당시 거창에는 제3연대 제3대대 본부가 있었으나 산청 방면에서 수색작전을 펴고 있었다. 거창경찰서 사찰주임 유봉순 경위는 대대본부에 와서 통화 내용을 알려주고 위천지서에 있는 부대의 정체확인을 요청하였다. 때마침 작전을 마치고 귀대한 대대장(한웅진 대위)은 정보장교(김철순 중위)와 함께 거창경찰서로 가위천지서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 통화 결과 대대장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반란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제3대대 본부에는 경비 병력밖에 없었기 때문에 즉각적인 출동이 불가능하여 경찰과 함께 거창 방어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밤 제10중대가 수색작전을 마치고 복귀하자 대대장은 중대를 직접 지휘해 위천으로 출발했으나 반란군들은 이미 위천지서를 떠난 상태였다. 제3대대는 계속 반란군들을 추격해 우마차에 약탈품을 싣고 가는 반란군 일부를 발견해 10여명을 사살하고 수명을 생포하였다. 이때 생포한 반란군을 심문한 결과 김지회, 홍순석 부대가 덕유산으로 입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는 즉시 예하 전 병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군․경 합동으로 덕유산을 포위할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포위작전에는 제3연대 제1대대, 제3대대, 제5연대 제3대대, 제9연대 제3대대, 그리고 독립제1대대(일명 서울유격대) 등 5개 대대와 경찰부대가 참가하였다. 3월 28일 밤 분산되어 있던 각대대와 경찰부대는 함양에 집결하여 다음날 밤 덕유산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30일 정일권 전투사령관은 작전부대를 진두지휘하여 포위망을 압축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란군들은 토벌작전이 시작된 후 2차에 걸쳐 거창을 습격하기도 했다. 전투사령부에서는 반란군의 거창 습격이 토벌부대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는 양동이며, 이들은 반드시 괘관산에서 잠시 휴식한 후 지리산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3월 29일 밤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가 덕유산을 포위하려고 부대를 배치하고 있을 때, 현지주민으로부터 안의 근방에 반란군들이 출현했다는 첩보를 받았다. 제3연대 제3대대는 안의에 출동하여 이들을 추격한 끝에 90여명을 사살하고 반란군 주력이 괘관산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전투사령부는 지체없이 괘관산 포위를 계획하고 주력부대를 이동시켰다. 한편, 제3연대 제3대대는 거창에서 함양으로 이동하여 괘관산에서 지리산으로 연결된 통로의 길목인 남원군 운봉면 피바위고개를 차단하였다.
4월 4일 토벌부대는 괘관산을 포위․압축하여 천정동에서 반란군의 숙영지에 박격포를 동원한 공격을 가했으며, 다음날에도 산발적인 공격을 가해 반란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에서 지휘체계가 와해될 만큼 큰 타격을 받은 반란군들은 이후부터 중대․대대 단위의 작전행동을 하지 않고 소규모 병력으로 흩어져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괘관산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둔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는 김지회․홍순석 일당이 지리산으로 잠입하였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들을 계속 추적해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 작전(1949. 3. 1~5. 9)
한편, 제3연대 제3대대는 4월 9일 03 : 00에 반선리 부락 청년단장이 “지금 반란군 30여명이 와서 술과 밥을 달라고 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대대장이 직접 본부요원 60명과 함께 출동하여 반란군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홍순석을 비롯해 정치부장, 후방부장 등 17명이 사살되었으며, 반란군 문화부장 외 7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김지회는 부상을 당하여 도주하다가 반선리 부근에서 죽었다.
1949년 4월 18일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 정일권 준장은 김지회 일당을 섬멸함으로써 서울로 복귀하는 동시에 제3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동 지구사령관에 임명되어 계속 잔당의 토벌작전에 임하였다. 1949년 9월 28일에는 김백일 대령이 지휘권을 인수하여 잔당들을 거의 섬멸함으로써 1950년 1월 25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는 해체되었고 1950년 2월 5일에는 호남일대에 선포되었던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그러나 호남 및 경남 일부지역에는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이현상을 중심으로 한 인민유격대가 활동하면서 북한군의 남침을 기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