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반란은 포항 교외 조천비행장 경비를 맡고 있던 제4중대(중대장 이영삼 중위)가 원대 복귀 명령을 받고 임무 교대를 위해 잔무를 정리하고 있던 1949년 1월 30일에 발생했다.

제4중대 재무대(財務隊) 선임하사관이 주도한 제3차 반란은 연대본부 연락병이 극비로 되어 있던 중대 교체의 기밀을 누설함으로써 발단이 되었다. 1월 30일 저녁 재무대 선임하사관은 이영삼 중대장을 계획적으로 요정에 유인해 만취시킨 후 혼자 중대로 돌아와 좌익계 병사들을 규합해 재무관 겸 소대장인 백달현(白達鉉) 소위와 하사관 1명을 사살하였다. 이들 반란군은 포항지구의 일부 좌익세력과 제1차 반란시 도주한 병사들을 대내로 진입시켜 무기고를 점령하는 동시에 전 중대원에게 동조할 것을 선동하였다. 그러나 이미 두 차례의 반란사건과 대대적인 숙군 선풍을 듣고 있던 대원들은 이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렇듯 중대원들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하자 약 30명의 반란군은 부근의 산악지대로 달아났다. 당시 반란군들은 중기관총 1정, 경기관총 5정, 다수의 소총과 실탄 500발을 가지고 도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3차에 걸친 반란사건을 거치면서 제6연대 장병들은 무조건 구속되어 한차례 이상씩의 조사를 받았으며 좌익 혐의자들은 숙군되었다. 숙군이 일단락되자 제6연대는 1949년 4월 15일 반란연대의 오명을 남기고 해체되어 제22연대로 개칭되었다.

결론적으로 제6연대에서 발생한 일련의 반란사건은 여수 제14연대 반란사건의 여파로써 발생했으며, 2, 3차 반란은 본격화된 숙군 바람 속에서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될 것을 두려워한 좌익세력들의 탈출극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6연대에서 발생한 세 차례의 반란과 관련해 특기할 만한 것은 팔공산으로 입산한 반란군들이 1946년 10월에 발생한 대구폭동 이후 일찌감치 산악 근거지를 마련했던 대구 지역 야산대와 합류해 팔공산 일대를 유격전 근거지로 확보했다는 점이다. 팔공산지구의 게릴라들은 세력면에서 지리산지구에 비해 보잘 것 없었지만 전략요충지인 대구를 위협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안고 있었다는 점에서 정부에 큰골칫거리가 되었다.

 

 

About Author

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