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연대로부터 임무를 인계받은 제2연대는 연대본부를 제주비행장에 위치시키고 제1대대를 남쪽 서귀포에, 제3대대를 북쪽 오동리에, 제2대대를 연대예비로 제주읍에 각각 배치하여 필요시 신속히 증원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이 무렵 계속적인 소탕작전으로 인민유격대는 상당수가 귀순하거나 사살되어 표면적인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정부는 이와 같은 정황을 감안하여 제주도에 발령했던 계엄령을 1948년 12월 31일부로 해제하였다. 그러나 표면상 활동을 중단했을 뿐 당시 제주도 내의 인민유격대는 내부적으로 조직을 강화해 가고 있었다.

 

제2연대 편성

 

이덕구가 직접 지휘하는 인민유격대는 부대 교체기의 경계 소홀을 틈타 제2연대가 제주도에 도착한지 3일 후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1949년 1월 1일, 제주읍 남쪽 한라산 기슭의 오동리 화엄사에 주둔하고 있던 제3대대가 인민유격대 주력에 의해 포위 공격을 받아 제3대대원 7명이 전사하였다. 제2연대장은 제3대대를 기습한 인민유격대의 규모를 1개 대대로 판단하고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 1월 4일부터 해군함정과 항공대의 경비행기를 지원받아 합동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에서 각 대대는 한라산을 포위하고 지역수색을 전개하였으나 지형 미숙으로 인해 인민유격대의 은거지를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1월 8일에는 인민유격대가 심야에 제주읍을 급습해 도청에 불을 지르고 심양지서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행동은 토벌부대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건재를 과시함으로써 도민들이 토벌부대에 선뜻 협력할 마음을 내지 못하는 분위기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작전을 지휘하면서 주민들이 한라산일대의 동굴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토벌작전보다는 선무공작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당시 제주도는 사건이 발생한 군·경의 계속된 토벌작전으로 인해 해안에서 한라산쪽으로 4~8㎞ 이내의 마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부락이 폐허가 된 상태였다. 때문에 주거지를 잃은 주민들은 인민유격대를 따라 산중으로 들어가 굶주림과 불안 속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토벌부대의 선무공작으로 이들 중 상당수가 산에서 내려와 정착하였지만 여전히 많은 주민들이 산속에 남아 있었다. 제2연대는 이들 주민들을 인민유격대와 분리시키기 위해 갱생원(피난민 집단수용소)을 설치하고 적극적인 주민 선무활동을 전개한 결과 산에서 내려온 주민이 1,500명에 달하였다. 연대는 이들을 갱생원에 수용하여 구호물자를 배급하는 한편 포로가 된 인민유격대도 처형하지 않고 사상계몽을 통하여 선량한 국민으로 갱생시켰으며, 양민으로 인정된 자는 전원 귀향 조치하였다.

 

정방폭포 앞에서 제2연대 제2대대원들의 기념촬영

 

이 밖에도 제2연대는 주민홍보를 위해 제주읍, 모슬포, 성산포, 한림 등의 읍·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면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연대는 인민유격대의 만행을 규탄하고 새로 도입된 대전차포, 박격포, 중기관총, 로켓포, 소총 등의 신예무기 전시와 화력시범을 통해 인민유격대의 귀순을 종용하였다. 귀순한 주민들에게는 구호물자를 배급하고 1주일간 정신교육을 실시했다. 제2연대장의 민심수습대책이 주효하여 군부대를 믿고 의지하게 되자 산중에 남아있던 피난민도 인민유격대가 군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줄을 지어 하산하였다. 난민들이 늘어나 갱생원만으로는 난민 수용이 불가능하게 되자, 제2연대는 중산간 부락을 재건해 함명리(咸明里)와 같은 ‘재건부락’을 만들기도 했다.

한편, 제2연대는 잔여 인민유격대에 대해서는 주민들의 협조로 1949년 1월 31일 남제주군 남원면 의귀리에서 30여명을 사살하는 등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해군, 항공대의 지원을 받아 2월말까지 소탕작전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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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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