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연대와 임무를 교대한 후 지형파악도 하기 전에 기습을 받았던 제2연대는 1949년 1~2월 선무공작으로 산에 올라간 주민들 상당수가 하산함으로써 귀순할 사람은 대부분 귀순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지었다. 이러한 결론에 따라 3월 초부터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전개되었다. 당시 육군본부는 봄이 되어 한라산의 초목이 무성해 지기 시작하면 토벌작전이 어려워질 것을 예상하고 해동과 동시에 인민유격대를 소탕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3월 2일에 유재흥 대령이 지휘하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이 전투사령부에는 제2연대를 비롯해 대유격전 전담부대인 독립제1대대(대대장 김용주 소령)가 배속되었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편성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먼저 선무공작을 전개하여 인민유격대와 주민을 분리시킨 후에 토벌작전을 실시한다는 작전개념에 의거해 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제1단계 작전인 선무심리전은 제2연대가 펼친 내용을 약간 보완한 것이었는데, 도내의 지도급 청년들로 선무공작대를 편성해 산으로 올려 보내 하산하지 않고 있는 주민들을 설득하여 하산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수용소를 추가로 설치하고 제주도청의 협조 하에 구호미와 의류품들을 분배하였으며, 생활자금도 2배로 늘려 지급해 주었다. 그리고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귀순전단을 살포하는 등 적극적인 선무공작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제1단계 작전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된 후에 제2단계 소탕작전이 전개되었다. 제2연대를 주축으로 한 토벌부대는 각 대대별로 작전지역을 할당하여 책임지역 내에 인민유격대가 출현하면 각 대대가 그 규모에 따라 중대, 대대별로 소탕작전을 실시하였다. 이때 L-4, L-5 비행기가 사제 폭탄과 수류탄을 투하하고 해군 함정이 대전차포로 한라산에 위협을 가했다. 그리고 해안지역의 부락경비를 담당한 경찰은 마을마다 15~16세의 주민들로 민보단을 편성하여 낮에는 농민을 보호하고 밤에는 인민유격대의 습격으로부터 마을을 방위하게 하였다.
유재흥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은 효율적인 작전임무수행을 위한 민·관·군의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갖춘다는 계획하에 민보단 1개 소대(25명)와 경찰 1개 분대, 군 1개 분대로 구성된 민․관․군 혼성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민보단 소대는 도내 초등학교 및 중학교 교사, 면사무소와 군청 직원, 청년단 간부들을 대상으로 1개월간에 걸쳐 기초 군사훈련을 실시한 다음 필요시 소집하여 소탕작전에 참여시켰다. 이들 혼성부대는 인민유격대에게 매우 위협적인 부대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제2연대 제1대대의 정수정 상사가 지휘하는 혼성부대는 남로당 제주도 군사부조직책 김민성을 비롯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핵심 간부들을 사살하고 각종 무기들을 노획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1949년 3월에 창설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본격적인 토벌작전 개시 후 약 2월 반만에 전투사령부를 해체해도 될 만큼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무렵 제주도의 무장대 조직은 거의 와해되어 제기불능상태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949년 5월 18일부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제2연대는 8월 13일 제주도경비임무를 독립제1대대(대대장 소령 김용주)에 인계한 후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제주도전투사령부의 해체는 사실상 제주4․3사건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이후에도 독립제1대대(1949. 8. 13~12. 28)와 해병대사령부(1949. 12. 28~1950. 6. 25)의 소탕작전이 있었지만, 작전의 성격은 인민유격대의 소탕보다는 민심을 수습하여 도민들의 재기를 돕는 대민활동에 맞추어졌다. 이러한 작전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남침이 있기 전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