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창수 상사의 지휘하에 약 3,000명의 반란군이 여수 시내로 향한 것은 20일 01 : 00경이었다. 반란군은 미리 연락을 받고 영내에 들어와 있던 민애청(民愛靑)소속의 서종현(徐鍾鉉)을 비롯한 23명으로부터 길 안내를 받았다. 여수 시내로 들어선 반란군은 봉산(鳳山)지서 출장소를 공격한 것으로 경찰과의 접전을 시작했다. 여수경찰서에서는 약 200명으로 저지선을 쳤으나 02 : 00경 경찰의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시내 곳곳에서는 반란군의 ‘경찰 섬멸전’이 아침까지 계속 됐다. 05 : 30경 반란군들은 시내 주요 기관들을 점령하고 처음으로 인공기를 내거는 한편 좌익 청년단체와 좌익계 학생들을 동원해 경찰, 국군 장교, 우익 인사 등에 대한 검거와 테러 활동을 본격화하였다.136) 20일 오전에 여수를 완전히 장악한 반란군은 09 : 30경 1개 대대 병력만을 여수에 잔류시킨 채 2개 대대 규모의 주력이 열차를 이용해 순천으로 북상했다.

여수시가 전경
여수에서는 오전 10시 읍사무소에 인민위원회와 보안서가 설치되었고 오후 3시에 중앙동 광장에서 ‘인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인민대회는 “한 집에 꼭 한 사람씩은 나와야지 안나오면 큰일 난다”는 붉은 완장을 찬 좌익계 청년들의 강요에 못 이겨 따라온 1,000여명의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지창수 상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남로당 여수지구당 위원장 이용기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보안서장으로 내정된 유목윤의 격려사, 지창수의 인사말, 민주청년동맹과 여성동맹 등 단체 대표들의 축사 등으로 이어졌다. 이날 인민대회에서는 이용기, 유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송욱 등 6인이 의장단에 선출되었고, 혁명과업 6개항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이 대회를 계기로 지금까지 지하에 숨어 있던 민애청, 민청, 학생동맹, 여성동맹, 합동노조, 교원노조, 철도노조 등 좌익단체 청년들 600여명이 자발적으로 ‘인민의용군’을 조직해 무기를 들고 경찰과 우익인사들의 체포와 재산몰수에 나섰다. 이에 따라 시내에는 긴장과 공포분위기가 확산되었다.
한편, 순천에서는 20일 새벽에 여수 철도경찰서의 여자교환수로부터 순천경찰서에 제14연대의 반란 사실이 전해짐으로써 경찰의 경계 태세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순천경찰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했으며, 순천의 각급 기관장과 유지들도 단순한 군경충돌사건 정도로 인식하였다. 이는 20일 09 : 00경 순천의 각급 기관장과 유지들이 순천 시내의 승주(昇州)군청에 모여 대책을 논의한 결과 “술과 안주를 군인들에게 제공해 군․경․민의 화해를 도모하자”라고 결론을 지은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10 : 30경 반란군이 순천역에 도착하면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09 : 30경 열차 6개의 차량에 분승하여 여수역을 출발한 반란군은 10 : 30경 순천에 도착하였는데, 순천에는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는 2개 중대가 북상중인 반란군의 주력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천에 도착한 반란군은 홍순석 부대와 합류해 3개 방면에서 순천을 압박해 들어왔다. 반란군의 공격으로 삼가리방면의 경찰소대가 일격에 격파되고 1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순천경찰서의 주력은 순천교 제방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광주에서 출동한 제4연대 선발 파견중대가 순천교-역전에 이르는 도로와 남초등학교-시청에 이르는 도로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경간에는 상호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경찰과 군의 연락 책임을 맡았던 남초등학교장 김경호의 증언에 의하면, “군인들은 싸울 의지가 없었고 태도가 불순했기 때문에 경찰서장과 협의해 경찰과 청년단도 개별행동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경찰과 청년단원들이 각각 분산됨으로써 반란군과의 교전은 종료되었고, 15 : 00경에 순천은 완전히 반란군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은 제4연대 선발 파견중대의 좌익계 하사관들이 중대장과 반대파 병사들을 살해하고 중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란군 주력은 순천이 점령되자 3개 방면으로 병력을 분산하여 학구(鶴口), 광양(光陽), 벌교(筏橋)로 진공하면서 경찰서와 지서를 파괴하고 경찰관들을 살해했다. 반란군들은 21일 새벽 순천경찰서 관내 별양(別良)지서, 벌교서 관내 조성지서를 점령하고 창성지서에서는 약 30명의 경찰관을 나체로 총살하기도 했다. 20일에서 21일 사이에 광양, 남원, 구례, 보성의 경찰서들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정부에서 여수․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작전을 본격화한 22일, 반란군 세력은 서쪽으로 보성, 동쪽으로 광양, 북쪽으로 구례·곡성까지 뻗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