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연대의 반란 소식이 육군총사령부에 전달된 것은 20일 01 : 00가 넘어서였다. 철도경찰대의 경비 전화망을 통해 올라온 반란의 급보를 접한 이범석 국방장관은 09 : 00에 국방부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참석자는 이범석 장관을 비롯해 채병덕 참모총장, 정일권 참모부장, 백선엽(白善燁) 정보국장, 로버츠(William Roberts) 군사고문단장, 참모총장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 정보국 고문관 리드(John Reed) 대위 등이었다. 사태 파악도 안된 상황이라 별다른 결론 없이 이범석 장관은 채병덕 총장에게 “조사단을 인솔해 현지로 내려가 사태를 파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채병덕 참모총장, 정일권 참모부장, 백선엽 정보국장, 하우스만 대위, 리드 대위, 통역장교 고정훈(高貞勳) 중위로 구성된 조사반이 미군 특별기편으로 즉시 광주로 갔다. 채병덕 참모총장과 정일권 참모부장은 현황 파악 후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진압군을 편성하는 한편 38선 경계 강화 조치를 취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의 제14연대 반란은 중앙 정부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어서 38선 경비 병력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가용 병력을 진압작전에 투입하였다. 21일 육군총사령부는 광주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송호성 준장을 진압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한편 제2여단(여단장 원용덕 대령) 예하의 제12연대(군산)와 제2연대(대전), 제5여단(여단장 김백일 대령) 예하의 제3연대(전주)와 제4연대(광주)를 진압부대로
순천방면에 급파했다.
진압군에 편성된 부대들이 순천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전에 광주 주둔 제4연대에서는 20일 01 : 30경 광주경찰청으로부터 반란 소식을 듣고 부연대장 박기병(朴基丙) 소령의 신속한 대응 조치가 있었다. 당시 광주의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은 제주도 경비사령관으로 나가 있었고, 참모장 오덕준 중령은 여수 제14연대의 출동을 보기 위해 여수출장 중이었으며, 제4연대장 이성가 중령도 서울에 출장 중이었다. 이에 따라 부연대장이 미 고문관과 협의해 1개 중대를 순천에 투입했다. 그러나 선발 중대는 학구를 경유해 순천으로 진격하라는 부연대장의 명령과는 달리 보성과 벌교를 경유해 10 : 00에야 순천에 도착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선발 중대는 이미 하사관들의 반란에 의해 장교들이 피살되고 반란군과 합류한 상태였다.

반란군 토벌을 위해 출동하는 진압부대
각 진압부대가 순천에 집결하기 시작한 것은 반란군이 순천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였다. 진압작전은 순천에서 광주로 향하는 북상로(北上路)와 백운산․지리산으로 향하는 도주로(逃走路)를 차단하고 해상과 육상에서 협공으로 여수반도 일대를 압박해 들어간다는 개념이었다. 진압부대 주력은 학구로 모여들었다. 학구는 화순 경유 광주, 남원, 하동에 이르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반군의 북상이 예상되는 지점이었다. 제4연대 1개 대대가 먼저 도착했고, 이어서 제3연대의 1개 대대와 제12연대의 2개 대대가 뒤를 이었다.
순천 탈환작전은 학구 공방전으로 막이 올랐다. 제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宋錫夏) 소령이 지휘하는 제3연대와 제12연대의 여단하사관교육대원, 조재미(趙在美) 대위가 지휘하는 제3연대 제2대대, 제4연대장 이성가 중령이 지휘하는 제4연대 1개 대대가 반란군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조기 진압이 어려웠다. 이때 20일 군산에서 광주로 이동해 순천으로 향하던 제12연대 부연대장 백인엽(白仁燁) 소령이 지휘하는 제12연대 예하 제2대대(대대장 김희준 대위)와 제3대대(대대장 이우성 대위)가 학구부근에서 진압군과 반란군의 공방전을 목격하고 하차해 합동공격을 벌려 반란군을 소탕하였다. 이 공격으로 반란군 일부가 투항하고 주력은 광양 방면으로 퇴각했다. 순천의 관문인 학구를 완전히 장악한 진압부대는 제4연대를 학구에 주둔시키고, 제3연대와 제12연대가 순천으로 향해 16 : 00경 순천 외곽지역을 완전히 포위했다.
순천 진공 계획은 순천과 광양으로 분리되는 삼가리(강청리)에서 동천강을 경계로 제12연대 제2대대가 봉화산 하단부를, 제3대대가 가곡동고지와 남봉산고지로 진출하고 제3연대의 제2대대가 조공으로 외곽고지를 차단하면서 축차적으로 전진을 한다는 것이었다. 제3연대와 제12연대는 21일 날이 밝으면서 일제히 시가지 소탕전에 들어갔다. 또한 대전 주둔의 제2연대 제1대대(대대장 최종윤 대위)가 제2여단장 원용덕 대령의 지휘하에 20일 남원초등학교에 제2여단사령부를 설치하고 21일 소탕전에 참가했다. 약 2개 대대 병력으로 추산되던 반란군의 주력은 이미 시내를 빠져나간 상태였고 경찰 무기나 죽창으로 조잡하게 무장한 좌익 학생이나 각종 좌익단체 단원들의 저항만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오전 중에 순천은 완전히 진압군 수중에 들어왔다.

국군의 호남지구 반란진압작전 (1948. 10. 19~1948. 10. 30)
순천을 장악한 진압군은 제12연대의 2개 대대를 비롯해 제4연대의 1개 대대, 제3연대의 1개 대대, 제2연대의 1개 대대 등 총 5개 대대 규모였으며, 수색대의 장갑부대와 전투사령부가 포함되었다. 이들 진압군은 곳곳에서 게릴라식의 기습을 벌이는 좌익 무장 단원들의 기도를 차단하며 치안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진압군은 우선 주민들을 남초등학교에 소집해 놓고 반란군 잔당과 좌익 부역자들을 색출했다. 3일간의 인공 기간 동안 순천에서 행해진 좌익계의 만행은 여수에서보다도 더 심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진압군이나 피해를 입은 우익계의 감정은 크게 격앙되어 있었다. 곳곳에서 즉결 처형이 잇따르고 한동안 살벌한 분위기가 순천을 지배했다. 긴장의 분위기는 웃지 못 할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22일 밤 순천군청에 위치하던 전투사령부에서 헌병보초가 너무나 긴장하여 고양이가 담 넘어 가는 것을 보고 무장대로 착각해 사격을 가하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경찰서와 군청 등에 배치된 우군간에 23일 04 : 00까지 사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진압군의 본격적인 순천 공격이 있기 전에 순천을 빠져나간 반란군 주력은 광양을 거쳐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전 태세를 갖추었다. 이 같은 반란군의 전략은 남로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유격전 근거지를 물색하기 위해 산악 지형을 정찰하고 있던 이현상(李鉉相)은 반란의 갑작스런 소식을 듣고 순천에 들어가 홍순석을 총사령관, 김지회를 부사령관으로 하는 반란군 지휘 체계를 새로 갖추고 최대한 신속히 산악지역으로 이동하여 장기적인 무장투쟁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전투사령부는 순천을 완전히 회복시킨 후 여수탈환작전과 각 지역으로 분산된 반란군의 소탕작전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정확한 정보획득이 어려워 기동성 있는 작전을 계획하지 못한 채 단지 광양방면과 여수방면으로 진공한다는 것만을 결정했다. 우선 전투사령부는 22일 제4연대의 일부병력을 광양에 투입해 적정을 수집한 후에 적절한 대책을 수립하기로 하였다. 이날(22일) 정부에서는 여수와 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다음날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에게 고(告)하는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최초의 광양 공격은 뜻밖에도 순천에 주둔하던 부대가 아니라 진주를 경유해 강동방면에서 반란군의 퇴로를 차단하던 마산 주둔의 제15연대 소속의 1개 소대였다. 당시 제15연대는 연대장 최남근(崔楠根) 중령이 지휘하는 1개 대대가 강동 방면에서 반란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이중 제1소대와 제4소대가 광양 공격에 차출되었다. 그러나 제4소대는 소대장을 비롯해 대원의 대부분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각자 부대를 이탈해 흩어져 버렸다. 이에 문중섭 소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만이 23일 아침에 독자적으로 광양 공격을 개시했다.
순천 방향에서는 23일 김희준 대위가 지휘하는 제12연대 제2대대가 차량을 이용해 광양에 처음으로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제12연대 제2대대는 광양에 먼저 진입한 문중섭 소위의 부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교전은 문중섭 소위의 부대를 반란군으로 착각한 제12연대 제2대대가 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함으로써 벌어졌지만 곧이어 태극기와 철모의 백선(白線) 표식이 확인됨으로써 쌍방간의 피해 없이 종료되었다. 제12연대 제2대대는 여수탈환작전을 위해 곧바로 순천에 복귀했다. 그러나 24일 반란군들이 광양에 진입한 부대가 소수임을 알고 이를 역습하기 위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됨에 따라 전투사령부에서는 제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 소령을 지휘관으로 2개 중대를 광양에 투입하였다. 이후 광양은 완전히 진압군의 수중에 들어왔으며, 박기병 부대는 여수공격을 위해 26일 순천에 복귀하였다.
광양 공격과 더불어 전투사령부에서는 24일 제1차 여수탈환 작전을 개시하였다. 제3연대의 1개 대대와 서울서 파견된 강필원(姜珌遠) 대위 지휘하의 장갑차 20대를 동원해 송호성 전투사령관이 진두지휘하여 여수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진압군은 여수 입구 장군봉(將軍峰) 부근에서 반란군들의 기습을 받고 급히 후퇴했다. 여기서 반란군의 사격으로 제1호 장갑차에 타고 있던 송호성 사령관이 차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고 고막이 상해 순천으로 후송 당했다. 이날의 공격은 “반란 일주일이 지나도록 여수를 탈환하지 못하니 이게 무슨 창피냐”는 정부측의 채근과 송사령관의 개인적 공명심이 결합해 빚어진 무모한 작전이었다.
제1차 여수 탈환 공격이 실패하자 전투사령부에서는 백운산방면의 반란군 주력을 추격하던 제12연대를 25일 순천으로 전진시켜 26일 아침 차량으로 여수방면에 투입하였다. 제2차 공격에는 해군의 충무공호를 비롯해 7척의 경비정이 동원되었으며, 부산 주둔 제5연대의 1개 대대병력의 여수 상륙작전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순천방면의 진압군 부대는 미평 방면에 집결해 제12연대의 2개 대대가 주공이 되어 시가지 동측을 담당하고, 제3연대 1개 대대가 옹호부대로서 종고산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또한 제2연대의 일부병력이 제2여단군수참모인 함병선 소령의 지휘하에 예비대로서 해안방면을 경계하면서 시가지로 진격하도록 계획되었다.
한편, 진압군의 제1차 공격 이후 반란군의 주력은 24일 야음을 이용해 여수에서 탈출하기 시작하였고 25일에는 시민들도 앞으로 닥쳐올 반란군과 진압군간의 결전을 피하기 위해 안전지대로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진압군은 26일 15 : 00에 구봉산, 장군봉, 종고산 등 외곽고지를 점령하고 시가지에 대한 박격포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12연대 제2대대는 기갑연대의 장갑차를 앞세워 시내로 돌입하였고 포위부대는 포위망을 축소시키면서 민가와 시민들을 수색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무렵에는 이미 반란군의 주력이 시내에서 빠져 나갔으며, 해상 탈출을 기도하던 선박들도 해군경비정의 봉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시내에는 좌익계 학생들과 단체원들만이 날뛰고 있었을 뿐 조직적인 저항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수를 탈환하고 있는 진압군
진압군의 여수 시가지 소탕전은 27일 새벽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세진 중위가 지휘하는 장갑차 12대가 시가지에 돌입하였으며 제12연대와 제3연대, 제2연대의 각 대대가 소탕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부산에서 해군 LST로 27일 여수신항 앞바다에 도착한 제5연대 제1대대(대대장 김종원 대위)는 반란군의 사격으로 부두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제5연대 제1대대는 부두로부터 500m 떨어진 해상에서 81㎜ 박격포 2문으로 부두를 향해 공격하였다. 하지만 선상에서 조준기도 없는 박격포로 수십 발의 사격을 가했기 때문에 아군 포격에 의해 제12연대 소속 제5중대장과 안성수 하사가 전사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제5연대 제1대대는 부두의 반란군들이 완전히 소탕된 이후에 무혈 상륙하여 제12연대의 후속 소탕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제3연대 1개 대대가 종고산 방면에서 시가지 소탕전을 전개하였으며, 제4연대가 광양방면에서 급거 여수탈환작전에 참가하였다. 제4연대의 경우 박기병 소령이 여수지구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광주지역의 사태가 험악해지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광주로 복귀하고 제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 소령이 여수지구 후방사령관이 되었다.
반란 9일째인 27일 오후 여수는 완전히 진압군에 장악되었으나 그 상처는 의외로 컸다. 작전지휘체계와 통신망의 미비, 지휘능력과 전투기술의 미숙, 인접부대와의 협조 부재 등으로 포위망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진압부대는 각개 종대별(縱隊別)로 여수로 진입해 들어갔다. 이에 따라 여수에 잔류하던 반란군은 진압군이 들어오기 전인 24일 밤에 이미 대부분의 병력이 시내를 빠져나가 김지회 · 홍순석 부대와 합류한 상태였다. 이러한 진압부대의 작전상 오류는 반란사건과 관련해 당시 국회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있던 정부가 정치적인 돌파구로서 군사적 효율성을 무시하고 조속한 시가지 점령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급한 작전은 시가지에 대한 무차별 포격으로 상당수의 민간인 희생자들을 낳기도 했으며, 사후 처리 과정에서 좌익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던 일부 시민들이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참모총장의 미 고문관이었던 하우스만이 회고하듯이 국군의 여순 탈환작전은 지나친 ‘속도전’이었다. 정부 수립 2개월에 겨우 군대 형태만 갖춘 한국군으로서 는 여수 · 순천의 신속한 탈환이란 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한편으로 여순 탈환 속도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반란군들이 산속으로 스며들 퇴로를 열어줘 이후 정부의 오랜 골칫거리가 되는 지리산 게릴라 문제를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