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념 정의
실학(實學)은 글자 그대로 ‘실질적인 학문’, ‘참되고 충실한 학문’을 뜻한다. 그러나 철학사적으로 실학은 단순히 현실에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리키는 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참된 앎이 무엇인지, 학문은 어떤 목적을 추구해야 하는지, 지식은 인간의 수양과 사회의 운영에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학은 인식론·윤리학·정치철학·사회철학을 포괄하는 문제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학의 핵심은 학문과 현실, 앎과 실천, 원리와 구체적 삶 사이의 관계를 재검토하는 데 있다. 학문이 경전의 문구를 반복하거나 추상적인 이론에 머무른다면, 그것이 참된 지식으로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도덕적 원리를 이해하는 일은 실제 행위와 제도의 개선으로 이어져야 하는가? 국가의 정치는 백성의 생활과 생업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어야 하는가? 실학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 학문의 진실성과 현실적 책임을 함께 검토한다.
다만 실학을 처음부터 조선 후기의 특정 학파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경구(2020)는 조선시대 문헌과 근대 신문·잡지에서 ‘실학’의 용법이 변화했음을 분석하며, 전통 유학에서 사용되던 보편적 개념과 근대 이후 형성된 조선 후기 학술사조로서의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실학은 한편으로 유학 내부에서 참된 학문을 지향하는 규범적 개념이고, 다른 한편으로 근대 학술사에서 특정한 사상가와 경향을 묶어 부르는 역사적 범주다.
2. 철학사적 배경과 발전 과정
1) 유학 전통에서의 실학: 참된 앎과 도덕적 실천
실학이라는 개념의 뿌리는 조선 후기보다 앞선 유학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학은 학문의 목적을 단순한 지식의 축적에 두지 않고, 인간의 도덕적 성숙과 일상적 실천에 연결했다. 공자의 학문관에서도 배움은 자신을 수양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과정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맥락에서 실학은 허황된 이론이나 명분만을 좇는 학문과 대비되는, 실제 삶에서 의미를 갖는 학문을 가리킨다.
그러나 전통적 실학을 오늘날의 실증주의나 경험주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전통 유학에서 ‘실’은 관찰 가능한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적 진실성, 충실한 마음, 실제 행위, 현실에 부합하는 정치적 판단 등을 함께 포괄할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 실학은 지식의 경험적 검증뿐 아니라 앎과 행위의 일치, 도덕적 수양의 진정성까지 문제 삼는 개념이다.
2)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는 단순한 대립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성리학은 인간과 세계의 원리인 이(理)와 기(氣), 인간의 본성, 도덕적 수양을 체계적으로 탐구했다. 실학 역시 유학의 경전과 도덕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으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학의 원리를 재해석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실학을 성리학에 대한 전면적 거부나 근대적 합리주의의 출현으로만 이해하면 그 사상적 연속성을 놓칠 수 있다. 조성환(2013)은 실학을 ‘실천학’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하면서, 조선 후기 실학을 서구적 근대화로 향하는 단일한 발전 단계로 규정하는 근대적 실학관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이 관점에서 실학의 의미는 성리학을 단순히 폐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 실제 삶과 정치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새롭게 묻는 데 있다.
3) 조선 후기 실학의 전개
오늘날 한국철학사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실학은 주로 17~19세기 조선 후기의 학문적·사회적 문제의식과 관련된다. 전쟁 이후의 사회적 변화, 토지와 조세 제도의 문제, 농업 생산과 상공업의 발전, 청나라를 비롯한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 변화 등이 학자들에게 기존 제도와 학문을 재검토하도록 했다.
이 시기 실학자로 분류되는 사상가들은 서로 동일한 철학적 입장을 공유하지 않았다. 유형원은 토지제도와 국가 운영의 개혁을 모색했고, 이익은 경세와 민생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다. 박지원과 박제가는 청나라의 문물과 상공업을 주목하며 이용후생의 문제를 다루었고, 정약용은 경학·정치·행정·법제·인간 이해를 포괄하는 저술을 통해 제도 개혁의 근거를 탐구했다.
이들을 하나의 학파로 묶을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지역적 배경과 학문적 계보, 정치적 입장, 경전 해석, 개혁 방안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백민정(2011)은 조선 후기 기호지역 실학 연구의 동향을 검토하면서 실학 및 기호실학이라는 학술 범주 자체를 비판적으로 재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실학을 단일한 교리나 조직적 학파로 보기보다 다양한 문제의식이 교차하는 사상사적 범주로 접근해야 함을 시사한다.
4) 경세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
조선 후기 실학의 특징을 설명할 때 흔히 세 가지 표현을 사용한다.
- 경세치용(經世致用): 학문을 국가와 사회를 다스리는 일에 활용한다는 뜻이다. 정치제도와 행정, 토지·조세제도 등을 검토하여 사회 운영의 실질적 개선을 모색한다.
- 이용후생(利用厚生): 사물과 기술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백성의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는 뜻이다. 농업뿐 아니라 상공업, 교통, 유통, 생산기술 등 현실의 경제적 조건을 중요하게 다룬다.
- 실사구시(實事求是): 구체적인 사실과 증거에 근거하여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이다. 문헌의 고증과 경험적 관찰을 중시하면서 선입견이나 공허한 추론을 경계한다.
이 세 가지는 실학의 중요한 경향을 보여주지만, 모든 실학자가 동일한 비중으로 이를 추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이 표현들을 실학의 완결된 정의로 간주하기보다는 정치·경제적 개혁, 민생의 개선, 지식 탐구 방법이라는 서로 다른 차원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안재순(2004)은 북학론을 중심으로 실학의 주체성 문제를 분석하며, 박지원·박제가·정약용이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과 사상적 지향에서 차이를 보였음을 설명한다.
3. 실학의 철학적 핵심 쟁점
1) 앎과 실천의 관계
실학의 근본적 질문 가운데 하나는 참된 지식이 실제 행위와 분리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지식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을 참된 학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실학은 학문적 이해와 실제 행위 사이의 연결을 중시한다.
조성환(2013)은 실학의 실천적 성격을 율곡 이이의 학문관과 연결하여 검토한다. 이 관점에서 실학은 조선 후기의 특정 학파가 갑자기 만들어 낸 사상이 아니라, 실심(實心)과 실천을 중시하는 유학적 문제의식 속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실학을 단순히 성리학의 반대편에 놓기보다 유학 내부에서 학문과 행위의 관계를 재구성한 흐름으로 볼 수 있게 한다.
2) 이론적 원리와 구체적 현실의 관계
실학은 추상적인 원리만으로 현실의 복잡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지 묻는다. 제도나 정책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목적을 내세우더라도, 실제 사회에서 백성의 생계와 국가 운영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그 타당성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따라서 실학은 원리의 정당성뿐 아니라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실학을 단순한 성과주의나 경제적 효용의 추구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실학의 현실 지향성은 도덕적·정치적 목적과 분리되지 않는다. 민생의 개선은 그 자체로 중요한 목표이지만, 동시에 정치의 책임과 학문의 사회적 의미를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3) 실학과 근대성의 관계
실학 연구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 중 하나는 실학을 한국의 근대적 전환을 준비한 사상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학자들이 기존 제도를 비판하고 상공업과 기술, 새로운 지식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은 근대성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서구적 근대화의 출발로 해석하면 조선 후기 사상가들의 유학적 배경과 당대의 역사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할 수 있다.
이경구(2020)는 실학이라는 용어가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김윤경(2022) 역시 조선 후기 ‘실’ 담론과 실학 개념의 변화를 분석하며, 실학이 근대에 형성된 해석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실학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상적 경향을 가리키는 동시에, 근대 이후 한국의 지식인들이 전통을 재해석하면서 구성한 학술 개념이기도 하다.
4. 현대적 의의
오늘날 실학의 철학적 의의는 학문이 현실과 맺는 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한다는 데 있다. 이론적 정합성만을 추구하는 학문은 구체적인 사회 문제에 대한 책임을 놓칠 수 있고, 반대로 단기적 효용만을 강조하는 지식은 장기적인 윤리적·사회적 결과를 충분히 검토하지 못할 수 있다. 실학은 이론과 실천, 원리와 현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제공한다.
또한 실학은 지식의 수용과 주체성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박지원과 박제가의 북학론은 외부의 문물과 기술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숭배하기보다, 그것이 조선 사회의 현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검토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김인석(2007)은 박지원의 북학 형성 과정을 분석하면서 새로운 인식의 틀이 기존의 중화 중심적 관념을 재검토하고 개별 사물과 현실의 가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다만 현대의 실학적 태도를 과거의 사상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과학기술, 경제, 정치제도는 조선 후기와 다른 조건에서 작동한다. 실학의 현대적 활용은 특정 정책이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지식의 사회적 결과를 검토하며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평가하는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5. 종합적 정리
실학은 참된 지식과 학문의 현실적 의미를 탐구하는 한국철학의 중요한 개념이다. 전통 유학에서는 도덕적 진실성과 실천을 강조하는 보편적 학문관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주로 조선 후기의 다양한 학문적·사회적 개혁 경향을 가리키는 역사적 범주로 이해된다. 경세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는 각각 국가와 사회의 운영, 민생의 개선, 사실에 근거한 탐구라는 실학의 주요 지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학을 성리학과 완전히 단절된 사상이나 서구적 근대의 단순한 전조로 규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실학자들의 사상은 서로 달랐으며, 실학이라는 용어 자체도 시대에 따라 의미가 변화했다. 따라서 실학을 이해하는 핵심은 하나의 고정된 학파를 상정하는 데 있지 않다. 학문은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참된 앎은 어떻게 실천으로 이어지는가, 지식은 인간과 사회에 어떤 책임을 지는가라는 문제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탐구하는 데 있다.
주요 원전
- 이이(李珥). 『율곡전서(栗谷全書)』. 실심·무실·경세와 관련된 논의를 참조할 수 있다.
- 유형원(柳馨遠). 『반계수록(磻溪隨錄)』. 토지제도와 국가 운영의 개혁에 관한 주요 저술.
-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경학·사회제도·경제·자연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수록.
- 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청나라의 문물과 사회에 대한 관찰, 북학적 문제의식과 관련된 저술.
- 박제가(朴齊家). 『북학의(北學議)』. 생산·유통·상업·기술의 개선을 통한 이용후생의 문제를 다룬 저술.
- 정약용(丁若鏞). 『경세유표(經世遺表)』. 국가 행정과 제도의 개혁에 관한 저술.
- 정약용(丁若鏞). 『목민심서(牧民心書)』. 지방 행정과 목민관의 책임, 백성의 생활을 다룬 저술.
학술논문
- 조성환. (2013).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 – 율곡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 -」. 『철학논집』, 33, 87–121.
- 안재순. (2007). 「실학의 인간관과 윤리적 특성」. 『유교사상문화연구』, 29, 99–125.
- 안재순. (2004). 「조선 후기 실학의 주체성 문제 – 박지원·박제가·정약용의 북학론을 중심으로」. 『동양철학연구』, 40, 69–103.
- 백민정. (2011). 「조선후기 기호지역 실학에 관한 연구동향과 과제」. 『유학연구』, 24, 111–184.
- 이경구. (2020). 「조선 시대 실학 용법에 대한 거시적 일고찰」. 『개념과 소통』, 26, 111–133.
- 김윤경. (2022). 「조선 후기 ‘실(實)’ 담론에 나타난 유교 패러다임의 변화」. 『한국철학논집』, 75, 71–110.
- 김윤경. (2022). 「1930년대 조선학 운동가들의 ‘실’담론과 ‘실학’개념의 형성 I – 정인보의 ‘조선학’과 ‘실사구시의 학’을 중심으로」. 『양명학』, 67, 91–128.
- 김인석. (2007). 「연암 박지원의 ‘북학’ 형성 과정 고찰」. 『한민족문화연구』, 22, 373–396.
- 이행훈. (2020). 「개념의 수행성으로 본 근대 지식체계의 굴절 – 도학, 실학, 철학을 중심으로」. 『한국철학논집』, 64, 217–246.
- 김경수. (2023). 「성리학의 리 개념 비판과 조선후기 실학의 전개: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를 중심으로」. 『인문논총』, 80(1), 109–136.
- 박수밀. (2024). 「실학(實學)과 실학파(實學派) 문학의 쟁점과 방향」. 『동방한문학』, 100, 231–260.
- 이시우. (2023).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이용후생과 실학정신」. 『율곡학연구』, 54, 183–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