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사건을 계기로 연대본부와 제2, 제3대대는 숙군이 진행되었지만 지리산지구에 출동중인 연대 하사관교육대와 제1대대의 2개 중대에는 아직 숙군 작업이 미치지 못했다. 이에 숙군당국(肅軍當局)에서는 토벌부대도 일단 복귀시켜 조사를 실시하고자 지리산지구의 제3연대 제3대대 병력으로 제1대대의 무장을 해제시켜 비무장으로 복귀시킨다는 계획을 준비했다. 그러나 제1대대가 무장에 불응함으로써 계획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고, 타부대를 통한 무장해제를 계속 강행할 경우 무력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상부에서는 제1대대장에게 실탄만을 회수해 복귀하도록 명령했다.
제1대대장 차갑준 대위는 함양에서 출발하기에 앞서 실탄 회수를 지시했으나 대대내의 좌익분자들이 항명함으로써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대대장은 즉시 경비통신을 이용해 실탄회수가 어렵다는 점을 연대본부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연대본부에서는 대대장 책임하에 복귀하라는 명령만을 하달하였다. 대대장은 고령에 도착해 또다시 연대본부에 실탄회수가 이루어지 않았으니 연대 병력이 출동해 실력으로 회수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연대본부에서는 이마저 병력이 없다는 이유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2월 6일 16 : 00에 복귀부대가 달성군(達城郡) 월배(月背) 부근의 성당지(城塘池)에 이르렀을 때 17대의 차량 중 후미차량 7대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대대장은 행군을 멈추게 한 후 후미차량(後尾車輛) 확인에 나섰다. 한참 후에 라이트를 켜고 후미차량이 서서히 달려왔는데, 이것이 반란의 신호였다. 대대 인사계 이동백(李東伯) 상사를 비롯한 20여명의 좌익계 병사들이 각기 흩어져 앞차에 승차한 조익학(趙翊鶴) 중위와 정주석(鄭柱錫) 소위를 사살하였다. 이어서 이동백 상사는 전원하차를 명령하고 탄약을 싣고 있던 제4번 차에 가서 실탄을 분배받으라고 하였다.
함양을 출발하기 전에 이동백 상사는 복귀 후 숙군될 것을 예상하고 대대내 좌익계 사병들과 대구 근교 월배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다. 이동백 상사는 대원들에게 “우리는 연대에 돌아가면 모두 숙군된다. 우리는 죽으러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모두 나를 따르라”고 강요했다. 이에 하사관교육대의 하사관 28명을 포함해 총 47명이 가세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분산하여 대구시 대명동에 있는 연대부대로 복귀하였다.
한편 반란 사실을 접한 연대본부에서는 헌병대와 특별경찰대 100여명을 현장에 파견하고, 1개 중대 병력을 투입해 반란군을 추격하게 했다. 반란군 토벌부대는 12월 7일 02 : 00에 낙동강을 도하하는 반란군을 포착하고 사격을 가했으나 야음으로 인해 타격을 주지 못했다. 반란군들은 유기시체(遺棄屍體) 1구와 자동소총 1정을 버리고 달성군 하빈면(河濱面) 신동(新洞)을 거쳐 팔공산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