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주둔 제6연대는 창설이래 5명의 연대장 가운데 김종석, 최남근 등 2명이 좌익 관련 장교였으며, 사병들 또한 소위 ‘대구폭동사건(1946. 10. 1)’의 관련자들이 대거 도피처로 삼아 입대함으로써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제6연대는 1948년 7월 10일 1개 대대가 제주도 토벌부대로 출동하였고, 8월 14일에 추가로 350명이 출동함으로써 연대병력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여순 10․19사건이 발생하자 1개 대대가 다시 연대장 김종갑(金鍾甲) 중령 지휘하에 함양방면으로 반란군 진압차 출동함에 따라 연대에는 본부요원들만이 잔류하게 되었다. 연대본부는 부연대장 최경만(崔慶滿) 소령이 지휘하였고 헌병대장인 김진위(金振暐) 대위가 정보주임대리를 겸하고 있었다.

당시 제6연대에는 남로당의 군조직책으로 연대인사계 곽종진(郭鍾振) 특무상사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정보과 선임하사관 이정택(李正澤) 일등상사가 곽종진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곽종진과 이정택은 제14연대 반란의 ‘호응투쟁(呼應鬪爭)’으로 연대내의 반란을 계획하였다. 11월 2일 이정택 일등상사는 헌병대장인 김진위 대위에게 곽종진 특무상사가 남로당 세포 책임자임을 계획적으로 밀고(密告)하였다. 이에 김진위 대위는 보좌관인 조장필(趙章弼) 소위에게 곽종진 상사를 헌병대로 연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12 : 00경 조장필 소위는 이정택 상사와 함께 짚차를 타고 연대본부 인사과에 도착해 곽종진 상사를 찾아 헌병대까지 임의동행(任意同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무렵 본부 사병들은 병기고 밖에서 기관총과 기타 무기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곽종진 상사는 조장필 소위에게 모자를 쓰고 나올 테니 잠시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하고 사무실에 들어갔고, 조장필 소위는 곽상사가 나오면 곧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짚차를 돌려놓은 상태에서 차안에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짚차에는 수송관(輸送官) 이갑(李甲) 소위와 이정택 상사가 동승하고 있었다. 야전점퍼에 45구경 권총을 숨기고 사무실에서 나온 곽종진 상사는 곧바로 배후에서 조장필 소위와 이갑 소위를 저격해 사살하였다. 이때 대기하고 있던 이정택 상사가 “여·순반란군들이 대구에 쳐들어 왔다”고 외치면서 본부 사병들을 탄약고 앞에 집합시켰다.

사병들이 집합하자 이정택 상사는 평소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던 하사관 10여명을 불러내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이때 부연대장과 군수주임 등 장교들은 한 사무실에서 이러한 사태를 목격하였다. 부연대장 최경만 소령은 단신으로 연대를 탈출해 연대 앞에 기지를 두고 있던 미 제1연대로 달려가 지원을 요청했다. 한편 시내에 위치한 연대헌병대에서는 반란 사실을 듣고 헌병대장 김진위 대위가 헌병 40여명을 이끌고 연대본부로 향했다. 그러나 헌병대가 연대본부 100m 전방에 도달했을 때 제3대대 소속의 배상수 중사를 비롯해 10여명이 정문에 차를 세워놓고 기관총 사격을 가해 헌병 6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를 낳았다.

반란군은 헌병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과 박격포 공격을 가한 후 3/4차량과 GMC차량 5대에 분승해 영문(營門)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때 최경만 소령의 지원요청에 따라 출동한 미군들이 기관총 사격을 가하자 반란군들은 차량을 버리고 도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반란군 중 상당수는 연대 안으로 되돌아갔지만 40~50명은 연대를 탈출해 김천방면으로 도주했다.184) 이들 반란군들은 소수의 지방 좌익세력과 합류해 칠곡군(漆谷郡)의 동명(東明), 가산(加山) 지서를 습격하고 김천에 파견되어 김천-왜관의 철도경비를 맡고 있던 1개 중대와 합류를 시도했다. 그러나 김천파견대가 오히려 반란군을 공격함에 따라 이들은 그대로 퇴각해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한편 연대 안으로 되돌아갔던 반란 동조자들은 헌병대에 무장 해제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1월 3일 반란 진압을 위해 청주 주둔 제7연대(연대장 심언봉 중령) 제2대대(대대장 박광혁 소령)가 대구에 투입되었다. 04 : 00에 대구에 도착한 제7연대 제2대대는 연대내 경비를 위해 2개 중대를 배치하고, 제6중대(중대장 김재강 중위)를 제6연대 김천파견대의 무장 해제를 위해 김천으로 보냈다. 다소간의 충돌이 예상되었지만 김천파견대는 순순히 무장해제에 응하고 대원들 모두가 대구의 연대본부로 호송되었다.

제1차 반란사건 이후 제6연대에는 대대적인 숙군 작업이 이루어졌다. 숙군은 부산의 제3여단 참모장 이영순(李永純) 중령의 지휘하에 법무장교 황필용(黃弼用) · 조병일(趙炳日) · 황철신(黃哲信), 헌병대위 김진위, 신철(申澈) 대위 등이 헌병 1개
소대를 동원해 이루어졌다. 헌병대는 400여명의 장병을 조사해 112명을 구속하였는데, 이들 중 6명이 총살형에 처해지고 나머지는 유기형을 언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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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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