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5일 오전 7시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등과 함께 제주도를 방문해 진압작전을 위한 최고 수뇌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柳海辰) 제주도지사,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최천(崔天) 제주경찰감찰청장, 딘 장군 전속통역관 등 모두 9명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회의석상에서 제9연대장과 경무부장간에 싸움이 벌어져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회의는 중단되었다. 이튿날 경비대총사령부는 진압작전을 좀 더 강력하게 추진할 목적으로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을 보직 해임하고 박진경 중령을 임명하였다. 박진경 중령은 일본군 학병출신으로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도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일본군이 한라산에 구축한 동굴진지의 구조와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경비대총사령부는 5월 1일 수원에서 창설된 제11연대 본부와 1개 대대를 5월 15일 제주도로 이동시켰다. 경비대총사령부는 제9연대(실병력 1개 대대)와 제5연대 제2대대를 제11연대에 배속함으로써 제11연대를 3개 대대 규모로 대폭 증강하고 박진경 중령으로 하여금 이 연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제11연대 편성 <1948. 5. 15>

 

제11연대장에 부임한 박진경 대령도 처음에는 김달삼과 만나 투항을 권고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달삼이 이에 불응함으로써 제11연대의 토벌작전이 본격화되었다. 제11연대장은 모슬포에 집결되어 있던 연대병력을 대대 및 중대 단위로 한림, 성산포에 분산 배치하여 경비와 소탕작전을 병행하기로 계획했다. 제11연대는 경찰과 더불어 서쪽으로 애월, 한림, 한경을 공략하고, 동쪽으로 구좌, 성산을 소탕했다. 또한 한라산 전면 소탕전을 펴 포위망을 좁힌 결과 수백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제11연대는 이러한 강경책과 더불어 온건책도 병행하였다. 좌익 조직이 약한 마을에 대해서는 적극적 선무공작으로 민심이 인민유격대와 합류하는 것을 막았고, 군경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마을 주위에는 돌로 방벽을 쌓도록 했다. 그리고 민보단을 조직해 인민유격대의 내습에 대비했다.

 

토벌부대는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돌담을 쌓고 낮에만 농사일을 하게 했다.

 

제11연대의 강력한 소탕작전에 직면한 무장대는 적극적인 교전을 벌이는 한편, 군내의 당세포로 하여금 연대장을 암살하게 하였다. 1948년 6월 18일 연대장의 대령 진급 축하연이 있던 날 밤에 연회장에서 돌아와 영내에서 취침하고 있던 박진경 대령이 남로당원인 문상길 중위의 지시를 받은 하사관에 의해 암살되었다. 박진경 대령의 암살사건은 국군이 토벌작전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군내 좌익계 색출을 위한 숙군(肅軍)작업의 시초가 되었다.

박진경 대령의 후임으로 제11연대장에 임명된 최경록 중령은 전임연대장의 살해범 체포에 전력을 기울여 7월 초순 문상길 일당을 체포하였다. 살해범이 체포된 뒤 제11연대는 장병들의 정신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새로운 작전개념하에서 토벌작전을 더욱 강화하였다. 우선 제11연대는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하여 폐허화된 지역의 주민과 선무공작으로 하산한 피난민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종전의 경찰위주로 실시되던 토벌작전을 경비대가 주도하는 작전으로 전환시켰다. 이에 따라 경비대는 인민유격대의 주력이 있는 내륙지역의 소탕작전을 담당하고 경찰은 인구가 조밀한 해안지역의 경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제11연대가 계속해서 적극적인 토벌작전을 실시하게 되자, 인민유격대는 투쟁방향을 장기항전으로 전환하여 조직을 재정비하고 식량의 자급자족 대책을 강구하면서 유격활동을 일체 중지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인민유격대는 점점 수세에 몰려 곤경에 빠지게 됐다. 주민 부락과 연계가 완전히 두절된 인민유격대는 자연굴, 방공호, 잣밭, 숲속, 풀막, 우물집, 흙집 등에서 비바람을 피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부락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있었으나 7월에 접어들어 식량보급마저 끊어져 아사(餓死) 지경에 빠지게 됐다. 특히 비상계엄령 아래에서 부락민의 행동을 극도로 제한하고 경비망을 확대, 강화시킨 결과 산속에 있는 인민유격대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에 따라 인민유격대는 종래의 지구별 지휘부로 국군의 토벌공세를 피하는 한편 생존을 위해서 점차 산악지대로 옮기게 되었다.

이렇듯 인민유격대의 활동이 어느 정도 진정 기미를 보이자 경비대사령부는 1948년 7월 24일 제11연대(연대본부 및 1개 대대)를 수원으로 복귀시키고 제9연대를 재편성하여 제11연대의 임무를 인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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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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