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하여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한라산 정상과 주요고지에 일제히 봉화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인민유격대및 자위대원 350명은 도내 16개 경찰지서 중 외도, 구엄, 애월, 한림, 대정, 남원, 성산, 세화, 함덕, 조천, 삼양, 화북 등 12개 지서를 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관, 서북청년단원, 대동청년단원, 독립촉성국민회 소속 회원 등 우익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살해하면서 제주도를 유혈의 참화 속으로 몰고 갔다. 제주도는 사회질서가 무너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고, 민심은 극도로 동요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계도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던 김달삼이 1948년 8월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 대표자대회’에서 행한 연설에 의하면, 인민유격대는 “45회 이상의 지서습격 및 야외전투를 통해 57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각종 시설물을 파괴하는 한편, 다수의 무기를 탈취하는 등 무장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하였다.” 이들 인민유격대는 자신들의 투쟁이 정당하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각 부락마다 ‘투쟁격문’을 붙이고 주민들을 선동하였다. 1948년 4월 10일자 인민해방군 제5연대 명의의 포고문 에는 당시 인민유격대가 지향했던 투쟁목적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우리 인민해방군은 인민의 권리와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고 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인민의 나라를 창건하기 위하야 단선단정을 죽엄으로써 반대하고 매국적인 극악반동을 완전히 숙청함으로써 UN조선위원단(朝鮮委員團)을 국외로 모라내고 양군(兩軍)을 동시철퇴시켜 외국의 간섭없는 남북통일의 자주적 민주주의 정권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투쟁한다.
一. 인민해방군의 목적 달성에 전적으로 반항하고 또 반항할여는 극악반동 분자는 엄벌에 처함.
一. 인민해방군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하야 매국적인 단선단정을 협력하고 또 극악반동을 협력하는 분자는 반동과 같이 취급함.
一. 친일파 민족반역 도배의 모략에 빠진 양심적인 경찰관, 대청원(大靑員)은 급속히 반성하면 생명과 재산을 절대적으로 보장함.
一. 전인민은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인민해방군을 적극 협력하라.
우(右)와 여(如)히 전인민에게 포고함.
4283년 4월 10일 인민해방군 제5연대”
제주도에서 대규모 무장폭동이 발생하자, 4월 5일 경찰에서는 경무부 공안국장 김정호(金正晧) 경무관을 제주도로 보내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이미 파견되어 있던 100여명의 경찰병력을 통합지휘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도 경찰국에서 1개 중대씩 8개 중대 1,700명의 경찰을 제주도로 급파하였다.82) 당시 경찰에서는 제주도 출신 경찰관들이 인민유격대와 지연 및 혈연 등으로 얽혀져 진압작전에 투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서 본토경찰관들을 증원시켰다. 이와 더불어 대정․성성(城成)지서를 경찰서로 승격시켜 제주경찰서, 서귀포경찰서, 대정경찰서, 성산경찰서 등 4개 경찰서로 확대․정비했다.83) 그러나 인민유격대의 기세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경찰로는 많은 희생자만 발생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경찰의 초기대응작전이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국방경비대 총사령부에서는 4월 17일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제9연대에 진압작전을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제9연대 편성 <1948. 4. 3 ~ 5. 14>
당시 제주도에는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사건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다. 제9연대장 김익렬(金益烈) 중령은 사건의 발생 원인을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대한 주민들의 감정폭발 정도로 파악하고 상부의 별도명령이 있을 때까지 중립태세를 유지한다는 자세를 취하는 등 사건의 전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더욱이 부산 주둔 제5연대로부터 4월 10일 증파된 제2대대장 오일균(吳一均) 소령은 약 1개월간 정비, 교육만을 실시하고 경찰의 출동 요청이나 주민들의 제보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장병들에게 공공연히 경찰을 비난하고 경·민간의 충돌사건에 경비대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선동하였다. 이 무렵 제9연대내에는 이미 남로당의 세포조직이 깊숙이 침투해 있었으며, 오일균 소령 또한 남로당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비대총사령부로부터 진압작전 임무를 부여받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제1단계 인민유격대와 주민의 분리, 제2단계 인민유격대 소탕작전전개’라는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진압작전에 임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병력 출동에도 불구하고 제9연대는 인민유격대와 접촉조차 할 수 없었다. 이는 연대내 남로당원인 오일균 소령과 문상길 중위가 조종하는 좌익계 하사관들이 작전계획을 인민유격대에게 사전 누출시켰기 때문이었다.

제주 4.3 사건 발발시 경비대 및 인민유격대 배치도
이러한 유동적인 상황에서 5·10선거를 열흘 앞둔 4월 30일 제9연대장은 오일균의 계략에 말려들어 이윤락 중위와 함께 대정면(大靜面) 구억리(九億里)에서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인 김달삼과 협상회합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없었으나 김익렬 연대장은 “무기를 버리고 하산하는 자는 생명과 생업을 보장한다”고 약속했고, 김달삼이 이를 전면 거부하지 않아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5월 3일 소위 ‘위장귀순사건’으로 평화적 해결의 기대는 무산되었다. 이를 계기로 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제9연대장에서 해임되고, ‘좌익’이라는 오해까지 받아 조사를 받기도 했다. 또한 함께 동행한 정보장교 이윤락 중위는 이에 대한 문책으로 파면되었다. 그러나 회합성사를 주도한 남로당원 오일균 소령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채 보직만이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