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에 접어들면서 미군정은 남한내 좌익세력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였다. 이 시기에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 이하 ‘미소공위’)를 통하여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이미 어려워지고 있다는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이미 한국 문제에서 세계 문제, 남․북한 문제에서 동․서간 문제로 변전되어 가는 냉전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시기에 3·1절 제28주년 기념일이 다가오자 남로당은 3·1절 기념일을 무기휴회에 들어간 미소공위의 재개투쟁과 결부시켰다.
당시 좌익세력은 1946년 이른바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폭동’을 계기로 많은 조직 군중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로당 중앙에서는 ‘미소공위의 재개’와 ‘조직 정비’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3·1운동 제28주년 기념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각 지방당에 투쟁 준비를 지시하였다. 이때 남로당은 3·1절 기념투쟁의 목표로 ‘모스크바 3상회의의 총체적 지지’, ‘미소공위의 재개’, ‘친일파․민족반역자 청산’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구호 이외에 남로당은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북조선과 같은 민주개혁의 실시’ 등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남로당 중앙의 투쟁 방침과 지시에 따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3·1절 기념투쟁’ 준비 작업이 진행되었다. 제주도의 경우, 2월 16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명의로 각 읍·면 인민위원회 및 조선민주청년동맹(朝鮮民主靑年同盟) 등에 「3·1운동기념투쟁의 방침」이 하달되었다. 「3·1운동기념투쟁의 방침」에는 기념투쟁준비위원회의 조직 방침 및 투쟁 방향, 투쟁 지침 등 세부적인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제주도에서는 1947년 2월 17일에 ‘3·1기념투쟁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결성식은 17일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에 제주읍(濟州邑) 일도리(一徒里) 김두훈(金斗壎)의 집에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위원장 안세훈(安世勳)을 비롯하여 약 30여명이 모여 치렀다. 3․1기념투쟁준비위원회가 결성된 이틀 후인 2월 19일 오후 1시경에는 위원회 소속 위원 약 25명이 김두훈의 집에 모여 3·1절 당일 군중 집회를 계기로 남로당 강령과 당세 확장을 목표로 하여 시위를 감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한편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주도하에 3·1절기념 투쟁이 대대적으로 전개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당시 제주감찰청에서는 2월 21일 좌익계의 수뇌이며 3·1기념투쟁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인 안세훈 외 5인을 초치해 상부의 방침을 전달하고 3·1절 기념집회를 각 리·동 또는 읍·면 단위로 개최할 때에는 반드시 관계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할 것이며, 시위는 절대 금지한다고 통고하였다. 이와 함께 제주감찰청에서는 관하 각서(各暑)와 좌․우익 각 단체 및 각 요소에 다음 사항을 게시하였다.
○ 각 관공서, 기타 각종 단체의 기념행사는 각자의 직장에서 행할 것.
○ 가두행렬, 데모행위를 전적으로 금함.
○ 기타 일반의 기념행사는 리·동, 주민은 읍·면 단위로 하고, 타 리·동·읍·면 거주자의 참가를 금함.
○ 리·동 또는 읍·면 단위로 기념행사를 감행할 시는 필히 집회허가원을 당국에 제출할 것.
이상 4개 항목을 경고·통첩함과 동시에 강인수(姜仁秀) 감찰청장이 도내를 순시하면서 좌담회를 통해 평화적으로 3·1절 행사를 치르도록 설득하였다. 또 이와는 별도로 미군정당국은 제주도의 정규경찰력 345명만으로는 사태 악화 때 수습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2월 23일에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응원경찰관 100명(각 50명)을 제주도로 파견하여 사태진전에 대비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1947년 2월 25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당일 오전에 결성식을 가진 민전 제주도위원회의 의장단을 제주도군정청에 보내 집회허가신청서를 제출하고, 제주도 미군정청 경찰고문관 패트릿치 대위를 만나 집회 허가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2월 28일 제주도 미군정청은 3·1기념 투쟁위원회 대표 안세훈 외 수명을 재차 초치하였다. 이 자리에서 제주도 군정관 스타우트 소령은 “시위행렬은 절대 금지하며 행사는 제주서비행장(濟州西飛行場)에서 할 것”을 최후 통첩하였다. 하지만 3·1기념투쟁위원회는 3월 1일 오전 10시 기념식을 갖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날 투쟁에 참가한 인원은 25,000명 정도였는데, 이중 남로당·민전·인민위원회·민청·부녀동맹 등 좌익단체에서 동원한 인원이 17,000명이었고 기타 군중이 8,000명이었다. 그런데 오후 2시경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여 경찰의 발포로 6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다수의 민간인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경찰의 발포 상황을 놓고 “시위대가 경찰관 내지 경찰관서를 공격해 오려고 해 자체방위상 발포하였다”는 경찰측 주장과 “평화적인 군중 내지 관람군중을 향하여 발포하였다”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이 사건은 당시 제주도를 관할하던 미 제6사단은 물론 미 제24군단까지도 주목할 만큼 중대한 사건이었다. 미군은 경찰의 진상보고서와 자체 조사를 거쳐 3월 20일 사건의 경위를 다음과 같은 요지로 결론지었다. ‘3·1사건’은 첫째 제주도 미 군정청의 불법집회 규정에도 불구하고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지도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이 발단이 되었으며, 둘째 시위 과정에서 기마경찰에 의한 어린이 부상자 발생과 이에 따른 시위자들의 경찰서 습격 위협, 그리고 “정신적으로 긴장되고 공산주의자가 지배한 조선민주청년동맹의 잠재적 잔인성을 경험한 응원경찰대”의 적극적인 시위 대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런데 ‘3·1사건’은 경찰이 가해를 하고 민간인이 피해자가 되었기 때문에 민심수습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이 기회를 이용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반(反)미군정․경찰 투쟁을 대대적으로 준비하였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산하단체에 “이번 사건에 발포한 것을 포착하고 적대심을 앙양시키는 동시에 민중이 지금 무조건으로 공포심을 가진 것을 해소시키는 것에 전력을 다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투쟁방침으로 “각 외곽단체 및 양심적 유지로 하여금 피해자와 부상자에게 물질 또는 정신적인 위로를 하도록 부추기고, 강동효(姜東孝) 서장 및 악질 경관을 극형에 처하도록 선전하는 동시에 삐라전을 전개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제주도 전역에는 ‘경찰은 인민을 죽였다’라는 내용의 전단이 살포되었다.
1947년 3월 7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각 읍·면위원회에 3·1사건 대책 투쟁에 대하여 라는 지령문을 하달하고 당내 투쟁조직으로서 ‘3·1사건 투쟁위원회’를, 당외 투쟁조직으로서 ‘3·1사건 대책위원회’를 합법적으로 읍·면·리·구에 구성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지령에 따라 3월 10일부터 진행된 총파업에는 행정기관, 학교, 회사, 은행, 교통․통신기관 등 약 160개 단체, 40,000여명이 참가하여 제주도의 행정 기능이 마비되고 연일 폭력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도내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각 직장은 전부 총파업을 실시하였는데 파업사항은 다음과 같다.
○ 제주도청을 비롯한 23개 기관 516명
○ 제주농업학교를 비롯한 13개교 교직원․학생 3,999명
○ 제주북국민학교를 비롯한 92개교 35,861명
○ 제주우체국을 비롯한 8개 우체국 136명
○ 제주여객 및 남진운수를 비롯한 7개 업체 121명
○ 남전 출장소를 비롯한 15개 단체 542명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총파업은 3월 14일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의 제주도 방문을 계기로 점차 진정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6일간의 제주도 시찰을 마치고 조병옥 경무부장이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도에는 경찰의 증원병력과 식량이 도착하였으며, 독립촉성청년동맹을 비롯한 우익계가 질서 정립을 위해 나섰다. 그 결과 4월 8일에는 각급 치안책임자를 비롯하여 지역 유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관민합동수습대책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한달 가까이 끌어온 공백 끝에 4월 15일경부터는 파업의 주동자 중 이미 잠적해 버린 몇 사람을 제외하고 100여명의 관련자들이 경찰의 단속망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하는 투쟁이 완전하게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3·1투쟁 이후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새롭게 조직을 정비하고 ‘당원확장운동’을 전개하면서 조직확대에 주력하였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3·1투쟁 이후 당의 핵심 인물들이 대거 검거됨에 따라 조직이 다소 와해되는 국면을 맞게 되지만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면서 조직의 재건·확대사업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당시 미군정에서는 미소공위가 개최되는 동안에 좌·우익 정당을 똑같이 대우한다는 온건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남로당은 이를 적극 이용하여 ‘당원 5배가운동(黨員 5倍加運動)’을 전개하였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에서도 이 시기를 이용하여 당원확장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48년 초에 제주도의 남로당원수는 약 5,000~6,00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의 보고서에 의하면, 약 500~700명의 남로당 핵심 인자들이 감언이설을 동원한 ‘당원확장운동’을 전개하여 약 10배에 가까운 사람들을 남로당에 가입시키고, 이들을 자신들의 투쟁에 동원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1947년 3·1사건과 3·10총파업 사태이후 조직 강화와 더불어 경찰에 대해서도 강경 대응태세로 급선회하였다. 이러한 남로당의 노선 전환으로 6월 6일에 구좌면 종달리에서 민청원들로부터 경찰관 3명이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경찰은 제주도 좌익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활동을 벌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오대진(吳大進), 김택수(金澤銖) 등이 일본으로 도피하고, 민전 제주도위원회 의장으로 3·1사건을 주도한 안세훈이 목포를 경유해 서울로 탈출하였다가 월북하는 등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핵심 인물들이 대거 제주도를 탈출하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1947년 8월에 조직을 군사부 중심으로 개편하고 위원회 산하에 ‘인민유격대(인민해방군이라고 불리기도 함)’를 창설하였다.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에 김달삼(金達三), 특별경비대장(기동대장)에 이덕구(李德九)가 임명됨으로써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젊은층의 강경파들이 온건파들을 누르고 위원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 인민유격대사령부 예하에는 전투부대 25부대와 직속부대 25부대가, 그리고 각 읍·면 단위로 1~2개의 유격중대와 자위대가 각각 편성되었다. 인민유격대는 한라산에 본부를 설치하고 북제주군 환경면 샛별오름 하단의 들판에 훈련장을 설치하여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