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주의(相對主義, relativism)는 진리, 지식, 도덕, 가치 또는 의미의 타당성이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게 성립하는 절대적 기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점·언어·문화·역사적 조건·개념 체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철학적 입장이다. 상대주의는 인간의 판단과 지식이 언제나 일정한 관점과 조건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러한 조건을 무시한 채 보편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태도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하나의 통일된 철학 이론이 아니다. 무엇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지에 따라 인식론적 상대주의, 진리 상대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문화적 상대주의, 언어적 상대주의 등으로 구분된다. 예컨대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지식이나 정당화의 기준이 개념 체계와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도덕적 상대주의는 도덕적 판단의 타당성이 문화적 규범이나 도덕적 관점에 의존할 수 있다는 문제를 다룬다. 이 입장들은 서로 관련되지만, 어느 하나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나머지를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주의를 이해할 때는 세 가지 입장을 구별해야 한다. 첫째, 인간의 판단이 실제로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이다. 둘째, 판단의 차이가 사회적·역사적 조건에 의해 설명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셋째, 서로 다른 판단 사이에서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객관적으로 더 참되거나 정당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첫째와 둘째가 성립한다고 해서 셋째가 자동으로 성립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갖는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견해가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대주의의 철학적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인간의 지식과 가치 판단이 특정한 조건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의존성이 객관적 진리와 보편적 정당성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지 검토해야 한다. 따라서 상대주의는 단순히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거나 “모든 사람의 의견이 옳다”는 주장과 구별되며, 진리·객관성·합리성·도덕적 보편성의 조건을 묻는 철학적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1. 상대주의의 핵심 개념
1) 진리 상대주의와 인식론적 상대주의
진리 상대주의(truth relativism)는 어떤 명제가 참인지의 여부가 특정한 평가 기준이나 관점과의 관계에서 성립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진리를 모든 관점에서 동일하게 성립하는 단일한 관계로만 이해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인식론적 상대주의(epistemological relativism)는 지식의 정당화 기준이나 합리성의 기준이 역사적·문화적·개념적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사회에서는 특정한 관찰과 증언을 신뢰할 만한 근거로 인정하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다른 방식의 증거를 중시할 수 있다. 또한 과학적 탐구에서도 무엇을 문제로 설정하고 어떤 증거를 중요하게 평가하는지는 이론과 연구 전통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곧바로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라는 결론을 뜻하지는 않는다. 지식의 형성에 관점이 개입한다는 주장과, 서로 다른 관점 사이에서 합리적인 비교나 비판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한다. 연구자들이 서로 다른 이론을 사용하더라도 관찰 결과, 논리적 일관성, 설명력, 예측의 성공 여부 등을 통해 이론을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핵심 쟁점은 지식이 관점에 의존하는지 여부만이 아니라, 관점에 의존하는 지식도 관점 사이의 비판과 비교를 통해 더 나은 정당화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2) 도덕적 상대주의와 문화적 상대주의
도덕적 상대주의(moral relativism)는 도덕적 판단의 타당성이나 정당화가 특정한 도덕적 관점, 사회적 규범 또는 문화적 체계에 의존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관점에서는 도덕적 옳고 그름을 모든 사회와 시대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하나의 기준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는 서로 다른 문화의 관습과 가치 체계를 그 문화가 형성된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가족관계, 장례 의례, 음식 규범, 공동체에 대한 의무 등은 문화에 따라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이러한 차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은 채 자신의 문화적 기준을 보편적인 기준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다만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모든 문화적 관습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태도는 동일하지 않다. 특정한 관습이 문화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그 관습이 반드시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문화적 맥락은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지만, 그 행위가 타인에게 미치는 피해나 권리 침해를 평가하는 문제까지 자동으로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또한 문화는 하나의 목소리로 통일된 체계가 아니다. 한 문화 내부에서도 세대·계층·성별·종교·정치적 관점에 따라 가치 판단이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문화를 고정된 단위로 간주하고 그 구성원 모두가 동일한 도덕적 기준을 공유한다고 보는 것은 문화적 상대주의 자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3) 관점 의존성과 객관성의 문제
상대주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은 관점 의존성(perspectival dependence)이다. 인간은 언제나 특정한 위치에서 사물을 바라보며, 어떤 정보를 선택하고 어떤 개념으로 분류할지 결정한다. 관찰과 판단은 언어, 경험, 이론, 관심사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관점 의존성이 곧 객관성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서로 다른 관찰자가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설명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증거를 충분히 고려했는지, 논리적으로 일관적인지 등을 검토할 수 있다. 객관성은 반드시 관점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점의 한계를 드러내고 증거와 논증을 통해 판단을 교정하는 절차를 통해 확보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상대주의와 관점주의(perspectivism)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관점주의는 인간의 이해가 관점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서로 다른 관점의 판단이 모두 동등하게 타당하다고 반드시 주장하지는 않는다. 반면 강한 형태의 상대주의는 관점 사이에서 독립적인 타당성 기준을 세우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적 논의에서는 “모든 인식은 관점에 의존한다”는 명제와 “어떤 관점도 다른 관점보다 더 정당할 수 없다”는 명제를 분리해서 검토해야 한다.
4)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다원주의의 차이
상대주의는 회의주의(skepticism), 다원주의(pluralism), 주관주의(subjectivism)와 밀접하게 연관되지만 서로 동일하지 않다.
회의주의는 지식의 가능성이나 정당화의 충분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회의주의자는 어떤 주장도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이것이 곧 진리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대주의적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회의주의는 판단을 유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반면, 상대주의는 판단의 타당성이 특정한 체계나 관점과의 관계에서 성립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다원주의는 서로 다른 가치나 관점, 삶의 방식이 복수로 존재하며 그중 일부가 함께 존중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원주의자는 복수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특정한 판단이 더 정당하거나 부당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다원주의가 반드시 상대주의인 것은 아니다.
주관주의는 판단의 타당성이 개인의 주관적 상태나 태도에 의존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상대주의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 문화, 언어, 개념 체계와 같은 집단적·이론적 기준을 문제 삼을 수 있다. 따라서 상대주의를 단순히 “사람마다 자기 생각이 있다”는 주관주의적 주장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구별은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도 중요하다. 상대주의가 어떤 형태인지 명확히 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입장을 비판하면서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반박했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상대주의의 철학사적 전개
1) 고대 그리스 철학: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
상대주의의 대표적인 고전적 출발점은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명제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인간척도설(人間尺度說)이다. 이 명제는 인간이 사물과 세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왔으며, 인식의 타당성이 인간의 경험과 관점에 의존한다는 상대주의적 문제를 제기한다.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는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이 지각과 앎의 관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다루어진다. 예를 들어 같은 바람이 한 사람에게는 차갑게 느껴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이때 상대주의적 해석은 바람이 차갑다는 판단이 지각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립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인간척도설을 모든 사람이 어떤 판단을 하든 그 판단이 무조건 참이라는 주장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프로타고라스의 저술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으며, 그의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저술에 남은 단편과 논박을 통해 재구성된다. 따라서 인간척도설의 정확한 의미와 상대주의의 강도에 관해서는 해석상 논쟁이 존재한다.
현대의 국내 연구에서도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극단적 상대주의로만 이해하는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편상범은 인간척도설을 일상적 경험을 지식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관점에서 재검토하고, 이정석은 『테아이테토스』에서 지각으로서의 앎과 인간척도설의 관계를 분석한다.
프로타고라스의 철학적 중요성은 객관적 세계에 관한 판단이 인간의 경험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질문했다는 데 있다. 다만 인간의 경험이 지식의 출발점이라는 주장과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서로 다르다. 인간척도설의 철학적 의미를 평가하려면 이 둘을 구별해야 한다.
2)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에서 지식이 지각과 동일하다는 주장과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연결하여 검토한다. 그의 논의에서 중요한 문제는 서로 상반되는 판단이 모두 참일 수 있는지, 그리고 지식과 참된 판단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다.
플라톤의 비판은 상대주의가 지식의 객관성과 전문가의 판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묻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건강 상태를 좋다고 판단하고 의사는 그 상태를 위험하다고 평가한다고 하자. 상대주의를 강하게 해석하면 두 판단을 모두 동등하게 참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의사의 판단이 더 정확한 정보와 전문적 근거에 기초한다면 두 판단을 단순히 동등하게 취급하기는 어렵다.
또한 플라톤은 상대주의적 입장이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는지 문제 삼는다. 만약 모든 판단이 그것을 내리는 사람에게 참이라면, 상대주의를 부정하는 사람의 판단도 그 사람에게는 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상대주의는 자신을 반대하는 견해를 어떤 근거로 비판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모순율을 통해 상반된 판단이 동일한 의미와 조건에서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논리적 원칙을 강조했다. 다만 모순율에 대한 옹호가 모든 종류의 상대주의를 자동으로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주의자는 판단의 기준이나 평가 맥락이 다르다는 점을 들어 두 주장이 서로 다른 조건에서 참일 수 있다고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상대주의가 단순한 관점의 다양성에 관한 주장을 넘어 진리의 본성, 논리적 일관성, 지식의 정당화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상대주의를 비판하려면 어떤 판단이 어떤 의미에서 상대적이며, 그 상대성이 논리적 모순을 실제로 발생시키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3) 근대 철학: 관습, 회의주의, 판단의 한계
근대 철학에서는 서로 다른 사회의 관습과 신념, 종교적 전통을 비교하면서 인간의 판단이 역사적·문화적 조건에 의존한다는 문제의식이 확대되었다. 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는 「수상록」에서 인간이 자신의 관습을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몽테뉴의 논의는 서로 다른 문화의 관습을 비교함으로써 자기 문화의 규범이 절대적으로 당연한 것이라는 믿음을 흔든다. 자신이 익숙하게 여기는 행동이 다른 사회에서는 낯설거나 부적절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판단이 관습과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관습의 다양성을 발견했다고 해서 모든 관습이 도덕적으로 동등하다는 결론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 철학의 문화 비교와 회의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경고하지만, 그 자체로 완성된 상대주의 이론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철학에서도 인간의 판단, 감정, 도덕적 평가의 조건을 검토하는 논의를 발견할 수 있다. 흄은 도덕적 평가에서 감정과 인간 본성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그를 단순히 도덕적 상대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의 도덕철학에는 인간의 공통된 정서적 성향과 사회적 관점에서 도덕적 평가를 조정하려는 요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철학적 논의는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의문과 인간 판단의 한계에 대한 성찰을 심화했다. 동시에 회의주의, 경험주의, 상대주의가 서로 다른 철학적 입장이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보여 준다.
4) 19~20세기: 문화인류학과 과학철학의 상대주의
19세기 말과 20세기에 들어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확대되면서 문화적 상대주의가 중요한 논점으로 발전했다. 특히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와 그 영향을 받은 인류학자들은 서로 다른 문화의 관습과 신념을 외부의 평가 기준으로 성급하게 판단하기보다, 각 문화가 형성된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접근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문화적 상대주의의 중요한 기여는 특정 문화를 인류 발전의 보편적 기준으로 삼고 다른 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평가하는 관행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의 역사와 환경, 제도, 구성원들의 의미 체계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러나 문화적 상대주의가 반드시 모든 도덕적 평가를 중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문화의 맥락을 이해하는 일과 그 문화 안에서 발생하는 부당함을 비판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문화 내부의 이견과 변화, 구성원의 권리와 경험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과학철학에서는 토머스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상대주의와 관련된 논쟁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쿤은 과학의 발전을 개별 사실이 차곡차곡 축적되는 과정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과학자 공동체가 공유하는 패러다임과 연구 관행의 변화에 주목했다. 서로 다른 패러다임은 무엇을 중요한 문제로 볼 것인지, 어떤 설명을 적절하다고 판단할 것인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곧바로 “모든 과학 이론은 동등하게 참이다”라는 주장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과학적 기준이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과 과학 이론 사이의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다. 과학철학에서의 핵심 논쟁은 패러다임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크며,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서 합리적 비교와 진보를 설명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5) 현대 철학: 진리 상대주의와 상대주의 비판
현대 분석철학에서는 상대주의를 모든 진리의 타당성을 부정하는 전면적 입장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특정한 종류의 문장이나 판단에 한정하여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국소적 상대주의(local relativism)도 논의된다.
예를 들어 미래에 관한 일부 판단, 인식적 가능성에 관한 표현, 취향에 관한 판단은 평가하는 사람이나 평가 시점에 따라 진리값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논쟁의 대상이 된다. 존 맥팔레인(John MacFarlane)은 평가 맥락의 역할을 고려하는 진리 상대주의를 발전시켰다. 이와 같은 논의는 상대주의가 단순한 문화적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의미와 진리조건을 설명하는 기술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한편 폴 보그호시언(Paul Boghossian)과 같은 비판자들은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지식과 정당화의 기준을 체계에 상대화할 경우, 서로 다른 체계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만약 모든 인식 체계가 동등하게 정당하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 자체가 어떤 근거로 정당화되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현대 상대주의 논쟁은 따라서 두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첫째, 특정 영역에서 진리나 정당화가 평가 맥락에 의존한다는 주장이 실제로 설명력을 갖는가? 둘째, 그러한 의존성을 인정하면서도 오류, 비판, 학습, 합리적 진보를 설명할 수 있는가? 상대주의의 철학적 성패는 이 질문에 얼마나 정교하게 답하는지에 달려 있다.
3. 상대주의의 철학적 의의와 한계
1) 철학적 의의
첫째, 상대주의는 자기 관점의 절대화를 비판하는 철학적 기능을 수행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문화와 사회의 규범, 자신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개념을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상대주의는 이러한 판단이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는 타인의 관점과 다른 문화의 경험을 이해하고, 자신의 전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출발점이 된다.
둘째, 상대주의는 지식의 역사성과 사회적 조건을 탐구하도록 한다. 과학적 개념과 이론, 도덕적 규범, 정치적 가치가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에는 특정한 시대의 문제의식과 제도적 조건이 작용한다. 상대주의와 관련된 논의는 지식이 완전히 무조건적인 관점에서 형성된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고, 지식의 형성 조건과 정당화 기준을 함께 연구하도록 한다.
셋째, 상대주의는 문화적 다양성과 관용의 철학적 근거를 검토하게 한다. 서로 다른 문화의 관습과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타인의 삶을 성급하게 평가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될 수 있다. 다만 관용은 상대주의에서 자동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아니다. 관용을 실천하려면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도 타인의 자유와 존엄을 존중해야 한다는 별도의 규범적 근거가 필요하다.
넷째, 상대주의는 언어와 개념 체계가 인간의 이해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게 한다. 동일한 사건도 어떤 개념을 사용하고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르게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분석하면 언어와 분류 체계에 내재한 전제를 드러낼 수 있으며, 기존의 해석이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인지 검토할 수 있다.
다섯째, 상대주의는 보편주의와 객관성의 개념을 정교하게 만들도록 한다.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엇이든 보편적이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 준다. 보편적 기준을 주장하려면 그 기준의 근거와 적용 범위, 예외 조건을 설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상대주의는 객관성을 무조건 거부하는 입장이 아니라, 객관성의 조건을 더 엄밀하게 해명하도록 촉구하는 철학적 문제 제기로 기능할 수 있다.
2) 철학적 한계와 비판
첫째, 상대주의에는 자기 논박의 문제(self-refutation)가 제기된다. 모든 진리와 판단이 상대적이며 어떤 관점도 다른 관점보다 더 타당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상대주의 자체도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므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다만 이 비판이 모든 형태의 상대주의를 곧바로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상대주의자는 자신의 주장을 특정 영역에 한정하거나, 모든 관점이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주장을 거부함으로써 반론에 대응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 논박의 문제는 상대주의가 어떤 종류의 상대성을 주장하는지에 따라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둘째, 상대주의는 판단의 차이와 판단의 타당성을 혼동할 위험이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상반된 견해를 갖는다는 사실은 그 견해가 모두 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과학적 설명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상반된 설명이 동일하게 타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의견의 다양성은 논쟁의 출발점일 수 있지만, 진리나 정당성에 관한 결론을 내리려면 별도의 논증이 필요하다.
셋째, 강한 상대주의는 비판과 오류 수정의 가능성을 약화할 수 있다. 어떤 도덕적 관습이 특정 문화에서 널리 인정된다는 이유만으로 그 관습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하다면, 그 문화 내부에서 부당함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문제 제기도 충분히 평가하기 어렵다. 문화적 상대주의가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더라도, 문화 내부의 갈등과 억압을 설명하고 비판할 수 있는 기준은 별도로 마련해야 한다.
넷째, 상대주의는 도덕적 진보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과거에 정당하다고 여겨졌던 제도나 관습이 오늘날에는 부당한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있다. 모든 도덕적 판단이 해당 시대의 기준에만 의존한다면, 과거의 관습을 현재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일이 어떤 의미에서 정당한지 설명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상대주의자는 역사적 맥락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특정한 관습의 변화가 왜 더 나은 변화인지 설명해야 한다.
다섯째, 상대주의는 객관성과 보편성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제한할 위험이 있다. 인간의 지식이 역사적·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서로 다른 관점 사이에서 공통의 증거와 논증을 통해 판단을 조정할 가능성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관점의 차이는 객관성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판단을 검토하고 교정하는 절차의 필요성을 보여 줄 수도 있다.
여섯째, 상대주의는 모든 관점을 동등하게 인정하는 태도와 구별되어야 한다. 어떤 관점이 특정한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진다고 해서 그 관점이 합리적이거나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은 아니다. 상대주의가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려는 취지에서 출발하더라도, 증거를 무시하는 주장이나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행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종합하면, 상대주의의 철학적 가치는 모든 판단을 무효화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진리와 가치 판단이 어떤 조건에서 성립하는지 질문하고, 자신의 관점을 절대화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보편적 기준의 정당화 가능성을 검토하게 한다. 그러나 관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과 모든 관점의 타당성을 동등하게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철학적으로 설득력 있는 상대주의는 자신의 적용 범위를 명확히 하고, 관점 사이의 비판과 정당화가 가능한 조건을 설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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