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유격대’는 남·북 노동당이 공식적으로 합당을 결정한 후인 1949년 7월에 조직되었다. 인민유격대가 조직된 것은 이전까지 남한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유격투쟁’을 조직적이며 좀더 대규모로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민유격대는 각 지구별로 3개 병단(兵團)이 편성되었는데, 오대산지구를 제1병단, 지리산지구를 제2병단, 태백산지구를 제3병단으로 하고 이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를 위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하에 ‘중앙당 14호실’로 통칭하는 ‘대남유격사업지도부(對南遊擊事業指導部)’가 설치되었다. 대남정치공작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헌영과 제2비서 이승엽(李承燁) 등이 전담하였다.
이로써 산발적이었던 각 지역 단위 유격투쟁은 첫째 북로당의 주도하에, 둘째 남한내의 한정된 지역 투쟁으로부터 남북 투쟁 국면의 한 부분으로, 셋째 투쟁의 기본 성격이 남북정권간의 대결로 발전하여 갔다. 따라서 이 단계의 무장투쟁은 통일된 지도하에서 통합되고 통제된 조직 체계를 갖추려고 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현지에서의 투쟁과정에서 나타난 제 양상은 반드시 계통적이고 조직적인 투쟁만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특히 직업적 유격부대인 3개병단과 지역 조직인 도당과의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유격부대와 도당 소속 유격대간에는 반목과 갈등이 더욱 심화되어 갔다. 이는 당내 파벌분쟁과 남·북 노동당간의 반목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격대의 지휘계통과 조직, 편성, 인적배치 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인민유격대 지휘체계
실제로 1949년 11월경부터 1950년 6월까지 ‘서울지도부’, 유격병단, 도당간에는 통신 연락이 두절됨으로써 적절한 통합 지휘가 불가능하였다. 특히 북한에 있던 남로당 수뇌부와 남한의 남로당원들 사이에는 지역적인 장벽으로 인해 원활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지휘는 남한 정세와 현지 감각이 완전히 무시된 채 하향일변도였다. 따라서 당초의 원대한 계획과는 달리 그들의 유격투쟁은 산만하고 비조직적인 것이 되어 협동에 의한 통합된 성과나 정치와 군사의 배합과 상호협력의 상승효과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지휘계통상의 문제점은 조직과 편성면에서도 나타났다. 남로당은 3개 병단을 중심으로 세 개의 유격전구(遊擊戰區)를 편성하는 방안 이외에 각 도당별로 무장대를 편성해 활동하도록 지시했다. 1949년 7월 ‘조국전선’의 이른바 ‘평화통일선언서’를 전달받은 남로당 서울지도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투쟁지시’를 하달하였다. “결정적 시기가 불원간 도래한다. 결정적 시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각 지방당은 정권접수를 위한 준비를 하라. 또한 인민군이 진격하게 되므로 각 도당은 ‘해방지구’를 1~2개 확보하라. 모든 당조직은 군사조직으로 개편하고 결정적 투쟁을 전개하라.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바치고 집 있는 사람은 집을 바쳐서 무기를 준비하라.”
이 지시에 따라 각 도당에서는 기존의 ‘야산대’를 중심으로 설정된 해방지구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도당 유격대는 순군사적인 직업적 유격대와는 달리 당조직의 정치적 토대를 기반으로 책임지역 내에서 정치 우선 투쟁을 전개하는 반정치적(半政治的)·반군사적(半軍事的) 조직체였다. 만약 산악 거점의 병단과 야산 지대의 도당 유격대가 전자의 군사력과 후자의 정치적 조직력을 배합하여 융통성 있게 기동적인 협동 작전을 감행하였다면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위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자간에는 상호협력 부족으로 인해 남한 전역에 대한 정군(政軍) 배합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병단이나 도당유격대를 불문하고 이들의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는 이른바 ‘해방지구’의 설치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해방지구’ 건설은 유격전에서 가장 중요한 당면목표의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갖춘 해방지구를 설치하지 못했다. 비록 그들은 일부 산악지대를 거점화했지만 소수의 농가만이 산재하고 인구가 희박해 인적자원의 충당조차 어려웠다. 여기에 국군과 경찰의 기동공간이 점차 신장됨에 따라 유격거점에 대한 공격이 수시로 이루어짐으로써 그들의 ‘해방지구 건설의 꿈’은 점차 요원해져 갔다.
한편, 남로당은 무장투쟁 단계에서 병단과 지방 유격대 이외에 도시의 당조직을 무장투쟁조직으로 개편하여 극한투쟁을 강행하였다. 1949년 9월 서울시 당원들은 6,000여개의 사제 수류탄까지 준비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폭동의 결과 “정치적으로 전당(全黨)의 85%의 비중과 권력을 가졌으며 조직적으로 전당의 60%의 세력을 갖고 있던 서울시당”의 약화와 붕괴를 초래하여 남로당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
남로당이 조직의 사활을 걸고 무장투쟁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북한정권은 남로당에 대한 지원에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북한 정권이 남로당에서 조직한 자생적 유격대의 역할보다 북한 지역에서 훈련되고 장비된 기성 무장부대의 남파에 보다 큰 의의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