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수립 이후 남로당은 투쟁전술을 무장유격투쟁으로 전환하고 1949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무력투쟁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남로당의 노선변화는 남한내의 각종 좌익사건을 계기로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입법되고, 1949년 10월 남로당에 대한 불법화조치가 취해지면서 활동영역이 축소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시기부터 남로당은 북로당과의 관계에서 종속적인 하위 부서간의 위치에 서게 되어 종전의 단독투쟁노선에서 점차 평양노선의 한 하급단위로서의 역할로 그 지위가 전락되어 갔다.
이에 따라 남로당은 자신의 존립기반이 남한 정부를 약화시키고 북한으로부터의 지지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남로당은 국군의 병력 분산을 통해 38선상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과 더불어 북한군이 남침할 경우 제2전선을 형성한다는 것을 투쟁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북한 정권은 남로당의 혁명역량을 단지 보조적인 가치로 밖에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1948년 7월 ‘남북노동당연합중앙위원회’의 구성,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조국전선’)의 창설, 1949년 7월 1일 남로당과 북로당의 ‘조선로동당’으로의 통합 등 일련의 기구 창설 및 통합을 통해 완전히 평양주도의 권력 체계가 확립되었다.228) 이로써 대남(對南) 공작의 중심은 완전히 북으로 전이되어 갔다.
이와 같이 북한 정권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이후 대남투쟁노선의 일환으로 유격투쟁은 남로당계의 주요 투쟁수단이 되었다. 이는 북한 정권의 소위 ‘평화통일노선’과 ‘무력통일노선’의 배합배치에 따른 조치였다.
조국전선의 결성과 남․북 노동당의 합당 후인 1949년 7월초 남로당계는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모든 조직을 총동원하여 정치투쟁의 최고 형태인 무력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정했다. 남로당계는 1949년 9월 25일을 기해 북한군이 공격을 개시할 것이라고 믿고 이에 대한 ‘호응투쟁’으로 소위 ‘7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감행하였다. 남로당은 이 투쟁 과정에서 세포중 열성 당원들을 무장시켜 유격 거점으로 입산하게 하였고 지방당의 조직을 군사조직으로 재편성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남한의 정권 접수 계획을 수립하여 지방 조직에 시달하기까지 하였으며, 도당의 일부 지역을 조정함으로써 독립된 ‘지리산전구’를 설치하여 유격거점으로 개편하였다. 또 각 도에는 1∼2개의 ‘해방지구(解放地區)’를 설치하여 북한군이 도래할 때까지 이를 확보하도록 결정하고 북한정권에 무장투쟁을 위해 필요한 무기와 탄약의 공급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북한정권은 38선 접경인 오대산지구에 일부 병력과 무기를 제공하였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시기 무력투쟁의 특징은 외견상 남·북 노동당의 합작 형태를 띠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남․북 노동당의 주도권 쟁탈전이 대단히 심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북로당은 민주기지노선에 입각한 무력통일, 즉 전쟁 역량의 축적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에서의 무장투쟁을 단지 무력 통일 투쟁노선의 일익 또는 단순한 한 단계 정도로만 평가하고 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남로당은 남한 혁명 투쟁의 주체가 바로 자신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에 따라 남·북 노동당간에는 외견상의 결속․협동과는 달리 내면적으로 갈등․괴리 관계가 심화되었던 것이다.
당시 남로당은 김삼룡, 이주하가 당 조직을 지도하던 이른바 ‘서울지도부’만이 남한에 존재할 뿐 박헌영을 비롯한 대부분의 당 수뇌들은 월북한 상태였다. 북한정권은 이들 월북한 남로당 수뇌부들을 권력에서 소외시켰을 뿐 아니라 위험하고 귀찮은 식객 정도로 취급해 멀리 해주에 집결시켜 놓았다. 사실상 모든 주도권을 박탈당한 남로당 계열의 불안, 불평과 초조는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내의 남로당계가 자파(自派)의 세력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남한에서 괄목할만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와 같이 북한내의 남로당계는 남한에서의 투쟁성과가 바로 북한에서 자신들의 입지와 직결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장투쟁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북한정권의 물리적 역량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남로당은 북한정권이 남침전쟁을 결심하게 하기 위해 이에 호응할 수 있는 자신들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이 이미 남한에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북한권력층에 납득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무장투쟁이었던 것이다.
결국 남로당은 남한내의 무장투쟁을 북로당계 세력과 동등 내지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사고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남로당은 남한에서 희망이 없이 지루한 투쟁을 전개하던 유격대나 당원들에게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의욕과 사기를 진작시켜야 했다. 그 유일한 방법이 ‘결정적 시기’의 도래와 ‘북한군의 남침’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남로당은 현실적으로 당내 역량이 크게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격렬한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