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적인 숙군 작업은 1949년 7월에 일단 막을 내렸다. 이 시기까지 숙군의 결과 총 4,749명의 장병들이 처벌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군 병력의 약 5%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숙군 대상자의 처리는, 반란 주모자와 적극적인 활동자, 폭력․파괴 행위에 가담한 자는 엄벌에 처하고, 좌익 경력은 있으나 소극적인 가담자들은 정상을 참작하는 쪽으로 이루어졌다. 재판 결과 90% 정도는 불명예제대를 시키는 선에서 형을 면했고 나머지는 사형 또는 유기징역 등에 처해졌다.

그런데 위와 같이 대대적인 숙군은 1949년 7월에 종료되었지만 이후에도 소규모의 숙군 작업은 계속 되었다. 1949년 8월 5일에서 8월 30일 사이에 서울 주둔부대에서는 총 163명(장교 28, 하사관 73, 사병 62)이 공산주의자로 체포·구금되었다. 1949년 9월 육군 기갑연대에서는 숙군 계획에 따라 6명의 장교를 체포하였다. 또한 1950년 2월 16일에는 1949년 9월이래 은밀한 수사의 결과로 군에 침투한 북한 간첩망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는데, 육군 58명, 공군 12명, 해군 5명 등 75명이 간첩으로 보고되어 이중 육군 49명과 공군 7명이 체포되었다.

한편 숙군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도 발생했다. 군내의 좌익 조직은 전군에 걸친 세포망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조사과정은 난관이 많았다. 우선 명단에 나타난 계보에 의하여 당사자를 검거하고 이어서 연루자를 각 부대별로 색출·구속하고 조사를 실시했다. 사상적인 문제라 증거를 보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자백만이 유일한 증거확보의 방법이 되는 경우도 있어 일부 고문행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동기생으로서 또는 친구로서 숙군 대상자와 술자리를 함께 했다는 이유만으로 조사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숙군의 총 지휘자였던 백선엽 정보국장이 회고하듯이 상부의 성화에 시달리며 시작된 숙군의 칼날이 얼마만큼 정확하게 환부를 도려냈는지 분명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대대적인 숙군 작업의 결과 군내의 좌익 세력이 일망타진되었다는 점과 그로 인해 한국전쟁시 국군의 성공적인 전투수행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숙군의 의의는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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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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