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孔子 (기원전 551/552~479)

 

기원전 6세기 고대 중국에서 최초로 독자적 사고 체계 를 형성하여 그 후 중국 문화의 뼈대를 이루어 온 유가 (儒家) 사상의 맥을 시작한 인물. 우리 나라에도 삼국 시 대에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論語)가 전래되어 기본 교 과서로 정착되면서 공자의 가르침은 한국인들의 인간관 과 사회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자의 생애와 사상 및 제자들에 대해서 가장 믿을 만한 자료는 《논어》이고, 이 보다 4~5백 년 뒤에 쓰여진 것이기는 하나 최초의 공자 전기인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의 《공자세가》(孔子世家)와 《좌전》(左傳)이 있다.

〔생애와 활동〕 공자의 이름(名 : 태어나면서 받는 이름으 로 가족과 스승만이 부를 수 있음)은 구(丘)이고 자(字 : 成 人이 되는 冠禮를 하면서 받는 이름으로 남이 보통 부름)는 중 니(仲尼)로서 산동 반도에 위치했던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 陬邑)에서 출생하였다. 노나라는 봉건 제도 를 실시하던 당시 주(周) 왕실에서 정치적으로 강한 제 후국은 아니었으나 주공(周公)을 시조로 모셨기 때문에 주나라 문화를 보존하는 데 특별한 관심과 자긍심을 갖 고 있었다. 공자가 태어난 해는 기원전 551년(襄公 21년, <公羊傳>과 <穀梁傳>)이나 552년(襄公 22년, <孔子世家>)으 로 춘추(春秋) 시대(기원전 722~481) 말기였다.

춘추 시기는 사회적 전환기로서 정치적으로는 불안한 시기였으나, 사상적으로는 다양한 전통과 새로운 규범이 형성될 수 있는 개방된 시기였다. 특히 춘추 말기부터 사(士) 계급의 진출이 눈에 띄어서 원래 무사(武士)로 시작된 사(士)들은 점차로 지식인들로서 학문과 제사 의 례에 전문적 훈련을 쌓아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사(文士) 계층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공자의 아버지 공홀(紇은 名이고, 字는 叔梁)은 맹손씨(孟孫氏)에 봉사하던 무사(武 士)였다. 공홀은 전투에서 공훈을 세워 사회적으로 성장 하고 있던 사(士)였으니 공자는 사족(士族)에 속했다고 하겠다. 공자의 어머니는 안(顔)씨로, 《사기》(史記)의 《공자세가》에는 공홀과 안씨의 관계를 야합(野合)으로 기록하였다. 야합이란 정식 혼례 의식을 거치지 않은 남 녀 관계를 지청하였는데 공자의 이런 출생이 당시의 사 회에서는 그의 교육과 출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은 것 같다. 공자는 차남으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빈곤하게 자랐다. 《공자세가》에서 공자의 족보는 송(宋) 나라(殷나라의 몰락한 왕족에게 조상 제사를 모시게 한 제후국) 의 명족(名族)으로, 노나라로 이민해 온 성인(聖人)의 후예로 미화되어 있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최근 학계의 정평이다.

공자는 어려서부터 사족(士族)의 자제가 보통 취직을 위해 익히는 기초적 육예(六藝 : 禮, 樂, 射, 御, 書, 數)를 배웠다. 15세부터 고급 학문인 《시경》(詩經)과 《서경》 (書經)을 공부했으며, 예악(禮樂)은 구두로 전승된 것을 익혔다. 30세에 이르러 독자적 입장을 세운 학자로 인정 을 받아, 귀족의 회계원, 예를 가르치는 가정 교사 등을 지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에 당시 문화적 선진국 으로 간주되던 제(齊) 나라에 유학을 가서 견문을 넓혔 다. 학자로서 공자는 “가르침에는 신분의 구별을 두지 않는다”(有教無類, 衛靈公 편 39장)는 대원칙을 지니고 있 었다. 이런 공자의 입장은 봉건적 신분 사회였던 당시로 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태도였다. 춘추 말기라는 사회적 유동성이 공자의 이런 개방된 입장을 수용할 수 있게 한 것 같다. 교육이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은 중 국과 오랑캐의 구별도 초월하였다. 그래서 “구이(九夷) 땅에도 군자(君子)가 가서 살면 교화가 이루어지리라”고 말했던 것이다(子罕 편 14장).

교육에 기초를 둔 공자의 평등 의식은 호향(互鄕)이라 고 사회적으로 멸시되고 소외된 마을의 젊은이가 그를 찾아왔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 공자의 제자들은 이 젊 은이를 보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으나 공자는 배우려 는 깨끗한 뜻을 갖고 온 사람을 물리쳐서는 안된다고 하 며 그를 받아들였다(述而 편 29장). 공자의 제자 28명 중 에는 빈천한 가정의 출신들이 제법 많았고, 문화 혁명 이후 공자를 다시 높이고 있는 중국에서는 이 사실을 강 조하고 있다. 덕이 높아서 공자의 깊은 사랑을 받던 안 회(顔回)는 가난해서 끼니 잇기가 어려웠고(雍也 편 11 장), 정치를 맡길 만하다고 스승의 칭찬을 들은 중궁(仲 弓)은 아버지가 사회적으로 빈천하였다(雍也 편 1. 6장). 공자가 자신의 딸을 준 공야장(公治長)은 죄없이 감옥살 이를 하고 있었는데, 공자는 딸을 그에게 시집보냄으로 써 제자의 결백함을 증언해 주었다(公治長 편 1장). 공자 는 그때까지는 전승된 문화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지녔 을 뿐 아니라 신념에 찬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학덕을 겸 비한 지도자들을 배출해 내었다.

공자가 노나라의 중앙 관직에 임용되었던 기간은 50 ~55세 정도로 약 5년 간이었다. 학자로서 이름이 난 공자를 노나라 수도의 건설국장〔司空〕으로 임용한 정공 (定公, 기원전 509~495)은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던 것 같다. 정공은 계씨(季氏)를 선두로 한 삼환씨(三桓氏)의 세력을 억제하기를 원했고, 공자는 이미 사병화(私兵化) 된 노나라의 군대를 제후에게 돌려서 독재 정치를 종식 시키려고 하였다. 공자가 52세 되던 정공 10년(기원전 500)에 법무부 장관〔大司寇〕의 자격으로 외교 협정〔來谷 의 會〕을 맺기 위해 정공을 모시고 제나라에 갔다. 제나 라 쪽에서는 사병을 진열시켜서 군대의 힘으로 노나라 군주에게 위압감을 주려 하였다. 공자는 의연하게 외교 관계에서 지켜야 할 예의를 설명하고 전쟁 때의 상호 협 조를 위한 조건으로 제나라가 빼앗았던 노나라의 땅을 반환케 하는 데 성공하였다(左傳 : 定公 10年條). 이와 같 은 외교 교섭의 성공은 계씨(季氏) 등 삼환씨(三桓氏)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서 공자의 충언에 따라 정공이 정 치를 이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자 는 노나라에서 도(道)를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고국인 노나라를 떠나 14년 간(55~68세, 기원전 497~484) 망명을 떠났다.

자로(子路) 안회(顔回), 자공(子貢), 염유(冉有) 등 몇 명의 제자만을 동반하고 당시의 여러 제후국들을 여 행하면서 공자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덕치(德治) 를 실현할 군주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공자가 14년 간 다녔던 제후국들을 차례로 나열하면 노(魯) → 위(衛) → 조(曹) → 송(宋) → 정(鄭) → 진(陳) → 위(衛) → 진 (陣) → 채(蔡) → 초(楚) → 위(衛) → 노(魯)의 순서이 다. 비록 공자의 망명 생활은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이 동안에 공자의 경험이 확대되고 인격이 성숙되며 견 식이 넓어져서 그의 사상이 완숙되었다. 공자가 노나라 에 돌아가 만년(晩年)의 교육 사업을 벌일 때 명성 때문 에 여러 나라에서 제자들이 찾아왔고, 그리고 이 망명 기간에 공자 자신과 그를 알아본 당대인의 사고 안에서 천(天)이 지니는 중요성도 많이 언급되고 있어 공자의 종교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자는 68세 때에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제 자신의 마 지막 사명은 장래를 위해 우수한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 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5년 동안의 마지막 교육 사업 은 옛 제자와 새 제자가 운집하여 노(魯)를 천하의 학술 중심지로 만들었다. 공자는 《시경》, 《서경》을 교과서로 사용하면서도 유교적 시각에서 도덕적 해석을 가했으며 예악을 정리 보존하였다. 따라서 그때까지의 중국 전통 문화를 집대성하고 그 전개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 74세 (기원전 476)로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제자들이 각 국에 퍼지고 초빙되어 공자의 가르침이 확대될 수 있었 다. 공자는 학자로서 국내외로 널리 존경을 받는 인물이 었으나 정치 이상을 당대에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또한 유교가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여진 후에도 그의 사상이 순수하게 완전히 실천되지는 못하였지만 공자의 가르침 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하나의 이상이요, 지표가 되어 왔다.

 

〔사상〕 공자가 직접 서술한 책은 없고,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한 언행록들만이 남아 있어서 그것을 사료로 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공자왈”(孔子日) 혹은 “자왈”(子日)로 해서 공자의 말씀을 전하는 기록은 《논 어》뿐만 아니라 《공자세가》, 《공자가어》(孔子家語) 및 《맹자》(孟子), 《순자》(荀子), 《예기》(禮記), 《역전》(易 傳) 등에 흩어져 있는데 그중에서 공자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기억해서 일대의 제자들을 통해서 전승된 것은 《논어》 하나뿐이다.

인간관 : 공자는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이 이루어 놓은 주(周)나라 성왕(聖王)들의 도(道)를 전승하는 사 람으로 자처하였다(述而 편 1장). 그래서 옛 것을 좋아하 여 그것을 구할 뿐 새로운 가르침을 창시한 것은 아니라 고 설명하였다(述而 편 19장). 그러나 공자는 옛 것을 답 습하는 평범한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전통 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여 인간적 의미를 더하였고 사회 적 윤리 체계를 갖추어서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그의 인간론을 그 이전의 인 간론과 비교해 보면 차이점이 드러난다. 《시경》과 《서 경》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임금을 위한 성왕(聖王) 또는 철왕(哲王)의 이상뿐이었다. 이러한 정치 능력을 중심으 로 하던 임금 위주의 인간론을 계승한 공자는 배움이라 는 수양론을 기초로 하여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 적 인간론을 제시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공자가 후기 유 학 전통에서처럼 철학적이고 우주적 체계를 지닌 이론적 인 인성론(人性論)을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의 인간론은 경험에서 나온 통찰로서 공자 자신이 성숙 되어 가면서 수정되고 심화되어 갔다.

공자의 인간론은 “자기를 닦아서 남을 편안하게 한다” (修己安人)로 표현되는 군자론(君子論)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배움을 통해 인격을 이루어 가는 군자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이루도록 재촉하던 이상적 인간상이다. 《논 어》 전체에서 공자는 완성자인 성인(聖人)보다도 배움 의 과정 속에 있는 군자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 다. 그런데 군자는 공자 이전에는 지배 계급을 지칭하는 호칭이었으나 《논어》에 와서는 옛 격언의 인용 등 소수 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률적으로 덕을 키운 인간다운 인격자를 가리킨다. 모든 덕의 시작이 자신의 마음을 공 경하게 하여 천부적인 도덕성(述而 편 23장)을 키우는 데 있기 때문에 수기(修己)는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 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사회적 파급 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덕이 있는 사람은 가정과 이웃을 편안케 할 뿐만 아니라 관직이 주어졌을 때 사회와 국가를 바르 게 할 수 있다. 여기에 공자가 정의한 군자의 둘째 부분 인 ‘안인’ (安人)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현대적 언어로는 정치 경제관이다. 수기의 완성인 인(仁)은 사회성을 지 니고 있어서 ‘안인’ (安人) 혹은 ‘안백성’ (安百姓)하는 길로 이끄는 데, 공자는 정치적으로는 정명(正名) 사상 을, 경제적으로는 균(均) 사상을, 사회적으로는 신(信) 사상을 제시하였다.

정치관 : 정명이란 각 사람이 갖는 명칭, 곧 사회적 위 치가 실제 권한과 일치하여야 사회가 바르게 되고 조화 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상이다. 제(齊)나라의 제후 경 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서 물었을 때 공자는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 (顔淵 편 11장)라는 유명한 답을 하였다. 임금은 임금답게 임금 으로서 해야 될 바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 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아들로서 해야 될 바를 다할 때, 모든 인간 관계가 바르게[正] 되어 바른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권리와 의무가 상호적 성격을 띤다 는 사실이다. 한 쪽은 요구하고 다른 쪽은 바치기만 하 는 게 아니라,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해야될 바를 다하 는 것이다. 이것을 후에 한대(漢代)에 이르러 유교를 절 대 군주제의 이념으로 적응시킨 동중서(董仲舒)가 제시 한 삼강(三綱)과는 다르다. 삼강은 임금과 아버지와 남 편이 신하와 자식과 아내의 규범이 되어 종속적 윤리관 을 형성한다. 그러나 본래 공자의 사상은 상호적 윤리관 이었고, 이러한 공자의 사상은 회복되어야 한다.

또한 정명은 명칭만을 고치는 피상적인 일이 아니라 제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해야 될 일을 할 수 있게 명칭과 실권이 일치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바른 위치에 있 는 사람이 거기에 해당된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때 나라의 형벌이 바르게 가해지고 예악이 성행하여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된다. 공자가 임금의 권한을 대행하던 독재자 계씨(季氏)의 횡포를 고발하고 억제하려던 것도 (八佾 편 1 · 2 · 6장 등) 정명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민주주의적 제도를 지향하는 현대에도 정명 사상은 유효 하다.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그 제도 안에 사는 사람들,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물이 정명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면 국정이 바르게 실천되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관 : 균(均)을 원리로 하여 재물의 균등한 분배를 이상으로 보았다. 《논어》 <계씨 편> 1장에서 공자는 당 시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으로 있던 제자 염유(冉有) 에게 “나라나 가문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백성이) 적 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재물이) 고르지 않은 것을 근심 하며, 가난한 것을 근심하지 않고 불안한 것을 근심한 다”는 충언을 해주었다. 재물이 고르게 분배되어야 가난 함이 없고 나라가 불안하지 않다는 공자의 확신은 〈옹야 편> 4장에서 “군자는 빈궁한 사람을 보충해 주지 부유한 데에 더 보태지는 않는다” 라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부족 한 사람에게는 더 주고, 남은 사람에게는 더 보태지 않 아서 나라의 재물이 골고루 분배되도록 해야 된다는 말 이다. 물론 공자의 경제관은 소박한 것이었다. 이미 그 당시에도 활발한 상업 행위가 행해지고 있었고 그의 제 자들 사이에도 화식(貨殖)이라는 투자 활동을 행하는 이 들이 있었는데(선진 편 18장), 공자는 이런 경제 활동을 단죄하지도 않았지만 적극 권장하지도 않았다. 경제 활 동에 능했던 자공에게나 가난한 속에서 도(道)를 즐기며 사는 안회에게나 공자는 평등하게 대했다. 공자뿐 아니 라 그 후 유가의 경제관 역시 소극적이다. 그래서 국가 가 백성과 이익을 다투어서는 안된다는 이상론을 제기했 고 국가는 국민의 경제 활동이 원활히 돌아가도록 보호 할 뿐 그 이상을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소극적 정책을 썼 다. 이런 유교의 경제관은 공자의 기본 사상이 부국 강 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해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회관 : 신(信)에 바탕을 두었다. 자공이 공자에게 나라를 다스릴 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공자는 “식량을 충분히 마련하고, 무기를 충분히 준비하 고, 국민들이 위정자를 믿게 하는 것이다”(顔淵 편 7장) 하고 대답했다. 자공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를 먼저 버 려야 하면 무엇을 버려야 할지 계속 물었을 때, 공자는 제일 먼저 무기를 버리라고 했고, 그 다음에는 식량을 버리라고 했다. 공자는 신뢰를 사회의 기초로 보았기 때 문에 국민이 위정자를 믿지 못하게 되면 정치가 이루어 지지 않고, 대인 관계에서도 상호간의 신뢰가 없어지면 그 관계가 깨지게 되며, 한 인간의 경우에도 신용이 없 으면 아무 쓸 데가 없게 된다(爲政 편 22장)고 보았다. 다 시 말해서 자신 안에 인(仁)을 이룬 인자(仁者)만이 남 과도 인자한 관계를 맺게 되어 남을 편하게 하고 널리 백성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 결국 인을 구현한 군자 를 중심으로 공자의 정치 경제 및 사회관이 엮여져 있 다.

종교관 : 공자는 그의 제자가 죽음과 귀신을 섬기는 법에 대해서 물었을 때 모른다고 대답했고(선진 편 12장), 조상 제사와 국가에서 드리는 자연신제(自然神祭)(八佾 편 12장)를 제외한 잡다한 신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 았다(述而 편 21장). 그래서 현대 학자들 중에는 공자를 종교적 회의주의자나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로 단정하 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제사를 지낼 때에는 신이 거기 계신 것처럼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했고(八佾 편 12장), 매달 초하루에 드리는 고삭제(告朔祭)가 복구되기를 원 했으며(八佾 편 17장), 시조(始祖)를 배향해서 하늘에 제 사를 드리는 체제(禮祭)를 중시하여 그 의미를 아는 사 람은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이 천하를 쉽게 다스릴 수 있 다(八佾 편 11장)고 하였다. 공자가 신령한 세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분석해 보면 우선 귀신(鬼神)과 천(天)을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귀신이란 조상 신들과 기타 자연신들로서 그들에게 예(禮)에 따라 지내 야 될 제사를 정성껏 지내 공경하되 동시에 예에 맞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 자기 신분에 맞지 않는 제사를 지내 려 하거나 복을 받으려고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다(雍也 편 22장). 이는 공자가 기복(祈福) 사상을 극복한 초연한 자세를 지니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천(天)은 생명과 도덕의 원천으로서 공자 자신 이 받은 덕과 문화를 전할 사명이 모두 천으로부터 왔다 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述而 편 23장 ; 子罕 편 5장). 학 문적 심화 단계에서도 50세에 이르러 천명(天命)을 이 해하게 된 후로 그의 수양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60세 에도 도에 맞는 것을 들으면 그대로 따를 수〔耳順〕 있게 되었고, 70세에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해도 규범에 어긋 나지 않게 되었다(爲政 편 4장). 그래서 아래로부터 배워 서 윗 것을 통달하게 된 공자를 참으로 이해하는 것도 하늘뿐이며(憲問 편 35장), 공자의 무죄를 증명해 주는 것 도 천이었다(雍也 편 28장). 하늘은 도덕의 원천이므로 하 늘을 속일 수는 없고(子罕 편 12장), 그래서 공자는 하늘 에 죄를 얻으면 달리 기도할 곳이 없다(八佾 편 13장)고 하였다. 만년의 공자는 천의 무언(無言)을 닮고자 하여 하늘이 말없이 사계절을 돌리듯이 자신도 무언의 교화를 할 수 있기를 바랐다(陽貨 편 17장).

이와 같이 공자의 사상에서 천은 도덕적 인간론의 근 거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천은 인간 안에 부여된 도덕성의 근원이요 도덕적 판단의 궁극적 규범으로서 군 자가 인(仁)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게 하는 신뢰처가 되 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일생 동안 사명감을 갖고 가르친 도의 성패(成敗) 역시 끝으로는 천명(天命)에 달 려 있다는(憲問 편 36장) 깊은 신앙을 드러냈었다. 공자가 《논어》에서 천에 대해 직접 언급한 말은 10장에 걸쳐 나 오는데 그중 약 2/3에 해당하는 7장의 내용은 인격적 천 을 상정한다. 곧 천이 공자를 통해 문화의 전수를 원한 다거나(子罕 편 5장) 공자가 죄를 지었다면 천이 벌하리 라(雍也 편 26장)는 의지성을 드러내고, 이해하고(憲問 편 37장), 빼앗고(선진 편 8장), 기도하는 등(八佾 편 13장) 천 과 인간 사이에 관계가(子罕 편 11장 : 季氏 편 8장) 이루어 지고 있다. 나머지 1/3에 해당하는 3장에서는 절대적 천 을 상정한다. 네 계절의 변화 속에서 천의 원리를 배운 다든지(陽貨 편 19장), 내재된 도덕적 명령으로서 인간이 깨달아야 될 것으로 나온다(爲政 편 4장). 공자의 천 사상 은 인격적인 면과 절대적인 면을 모두 지니는 양면성에 서 오는 역동성을 갖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공자의 천관 (天觀)이 지닌 이런 양면성 때문에, 마테오 리치가 중국 에 들어와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소개할 때 보유적 (補儒的) 입장에 서서 유교 경전의 상제(上帝)가 곧 그 리스도교의 천주(天主)라고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확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군자 ; 논어 ; 예 ; 인 ; 천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1995. 1권 . pp.496-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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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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