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현양 운동 殉教者 顯揚 運動
순교자들의 행적과 신앙을 조사 · 연구하고 널리 전함으로써 신자들이 이를 본받도록 하려는 운동. 넓은 의미로는 신자 각 개인의 자발적인 순교자 공경은 물론 순교행적 조사와 연구 활동, 시복 시성 추진 운동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 현양 운동은 교회 창설 직후에 시작된 자발적인 순교 신심 함양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전 교회 차원에서의 본격적인 현양 운동은 일제 치하에서 설립이 무산되었다가 1946년 9월에 창립된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의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자발적인 순교자 공경 시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순교자 공경을 하였다는 기록은 신해박해(1791)의 순교자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권상연(權尚然, 야고보)을 기리고 그 신앙을 모범으로 삼았다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신자들은 순교자의 두발 · 목침 · 옥중 수기 등을 보관하면서 신앙 함양의 바탕으로 삼았으며, 순교 성인을 주보로 모시거나 성인전을 통해 신앙을 발전시키고, 때로는 순교자의 유품과 유해 일부를 영약(靈藥)으로까지 생각하였다. 또 1794년 말에 입국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매우 중요하다는 교회 전통을 신자들에게 인식시켜 주었다.
순교자 공경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순교 행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 작업은 곧 한국 천주교회의 시복 시성 운동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1838년 말에 이루어진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L. Imbert, 范世亨) 주교의 순교 행적 조사에서 시작되어 박해 시기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제5대 조선 교구장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 때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 여기에는 신자들 사이에 널리 전파된 천주 가사(天主歌辭)와 순교 성인전들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신자들의 자발적인 순교자 공경은 순교의 영광을 얻고자 하는 종말론적 영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 활동과 신앙 행위가 순교자 현양 운동으로까지 승화된 것은 아니었다.
순교 행적 조사는 박해 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점차 순교자 현양 운동으로 변모되었다. 특히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는 이 과정에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백서〉(帛書)를 비롯하여 《괴히일기》 · 《치명일기》 등을 간행하였고, 각처에서 순교자의 유해를 발굴하거나 순교 터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들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자발적인 현양 활동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하였다. 또 1918년 교황청에서 병인박해(1866 이후) 순교자 26위의 시복 수속이 정식으로 선포되고 기해박해(1839)와 병오박해(1846)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을 앞두자, 《경향잡지》에 순교자들의 행적을 게재하면서 각 본당별로 시복을 위한 자발적인 기도와 현양 운동을 전개하도록 유도하였다.
〔순교자 현양회 활동 시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순교자 현양 운동을 전개한 것은 1925년 7월 5일 79위 복자가 탄생한 뒤였다. 이때부터 순교자 현양 운동은 각 본당별로 이루어지다가 1939년의 기해박해 순교100주년을 앞두고 전 교회 차원의 현양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즉 1937년 11월에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가 순교자 현양탑 건립을 주장하고, 경향잡지사 에서 여기에 적극 호응하면서 현양탑 건립을 위한 기금모금 운동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1939년 9월 8일에 제9대 서울교구장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주교 명의로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기인회가 조직되었고, 9월 24일에는 서울의 계성심상소학교(현계성학교의 전신)에서 발기식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불허로 발기식은 좌절되었고, 동시에 순 교 현양탑 건립 운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더구나 일제 말기에는 순교 정신에 대한 강조가 때때로 일제의 통치 체제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였다. 한편 전주 지목구에서는 1939년 되재 본당 주임 박문규(朴文奎, 미카엘) 신부의 집전으로 전주의 신자들이 모여 천호(다리실) 순교비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일제의 불허로 창립되지 못했던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9월 16일 복자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발기식을 가졌다. 이때 위원장은 윤형중 신부, 경리는 정원진(鄭元鎭, 루가) 신부, 서기는 이완성(李完成, 요한) 신부 · 장금구(莊金龜, 요한 그리소스토모) 신부, 그리고 위원으로는 조종국(趙鍾國, 마르코) · 장면(張勉, 요한) · 박병래(朴炳來, 요셉) · 박대영(朴大永, 베르나르도) 등이 임명되었다. 이 현양회는 창립 직후부터 박해 시대의 유물들을 수집하여 《경향잡지》에 소개하였다. 그리고 순교 터 확보에 노력하여 1949년 5월 7일 새남터 부지 1,340여 평에 대한 점용 허가를 받을 수 있었으나, 이듬해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활동이 일시 중지되었다. 이와는 별개로 전주 지목구에서는 1949년 7월 17일에 치명자산의 십자가비 건립 제막식을 가졌다.
순교자 현양회의 활동은 휴전 후에 재개되었는데, 이 때 현양회에서는 먼저 타인에게 양도된 새남터에 대한 사용권을 다시 얻는 데 노력하여 1955년 4월 12일 약 2,000평을 확보하고, 이듬해 이곳에 ‘가톨릭 순교 성지(聖址)’라는 기념탑을 건립함과 동시에 순교 현양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현양회에서는 양화진 순교 터 순례를 계속하는 한편 순교 행적을 조사하였고, 전국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부지 확보 운동을 전개한 결과 1956년 12월에 그 일대의 부지 1,381평을 확보하였으며, 동시에 이곳을 ‘절두산 성지’ 로 명명하였다. 1957년 9월 29일에는 서울에서 순교자 현양을 위해 성신중 · 고등학교에서 명동 대성당까지 가두 행렬이 있었으며, 현양회에서는 이듬해 9월 복자 성월을 전후하여 기념탑 건립 운동을 시작한 결과 1962년 9월 1일 절두산에 ‘가톨릭 순교 성지 기념탑’을 건립할 수 있었다. 한편 대구교구에서는 1958년에 순교자 현양회 대구 지부를 결성하고 교구 차원에서의 현양 운동을 전개하였다.
〔지역별 현양 운동 시기〕 이 무렵은 병인박해 순교자 26위에 대한 교황청 수속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이에 한국 주교단에서는 1962년 11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뒤 교황 요한 23세에게 26위의 시복이 1966년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청원하였다. 또 순교자 현양회에서는 1964년 3월 17일 전국위원회를 열고 2년 뒤에 있을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 기념 사업을 확정하여 주교 회의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순교자 유물과 관계 자료 수집, 둘째 순교 터 확보 운동, 셋째 전기 발간, 넷째 교구별 순교 복자 성당과 기념탑 건립 등이었다. 이때 주교 회의에서는 그 동안 범교구적으로 운영되어 오던 순교자 현양회의 활동을 서울대교구만으로 한정하고, 기념 사업은 각 교구별로 추진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순회 기도회 · 강론 · 사진 전시회 · 성지 순례 등 순교 신심 현양 사업이 교구별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 지역별로 현양 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서울대교구에서는 순교자 현양회의 현양 사업을 최석호(崔奭浩, 바오로) 신부에게, 자료 수집 및 연구는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에게 위임하였다. 그리고 1965년 9월에는 김창석(金昌錫, 타데오) 신부를 위원장으로 하는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 를 발족시키고, 절두산의 순교 복자 성당과 기념관 건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성당과 기념관은 1966년에 시작되어 이듬해 10월 21일 봉헌되었고, 그에 앞서 최석우 신부가 8월 1일에 초대 기념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기념관에서는 현양회에서 그 동안 수집한 유물들과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자료들을 인수하였다. 한편 각 교구에서도 현양 사업의 일환으로 ‘복자 성당’들을 건립했는데, 전주교구의 복자 성당(1967), 마산교구의 상남동 성당(1968), , 수원교구의 서둔동 성당(1969), 대구대교구의 신천동 복자 성당(1970)등이 이때 봉헌되었다. 또 전주교구에서는 1968년에 숲정이 순교 현양탑을 건립하였다.
1968년 2월 15일 교황청 시성성에서는 시복이 예정된 순교자들의 유해를 조사하고, 이를 분배 혹은 공경할수 있도록 절두산 기념관 지하에 마련된 성해실(聖骸室)로 옮기는 일을 서울 · 수원교구장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주교에게 위촉하였다. 이 작업은 주교 대리 류영도(柳榮道, 디오니시오) 신부, 신앙 촉구관 최석우 신부, 서기 장익(張益, 요한) 신부 등에게 위임되었다. 이에 앞서 절두산 기념관에서는 1967년에 명동 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 · 다블뤼 주교 · 볼리외(B. Beaulieu, 徐沒禮) 신부 · 도리(P.Dorie, 金) 신부 · 위앵(L. Huin, 闕) 신부 · 오매트르(P.Aumaitre, 吳) 신부 ·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 남종삼(南宗三, 요한) · 최형(崔炯, 베드로) · 장주기(張周基,요셉) ·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 이호영(베드로) 등 12명의 유해와 언구비(彥九碑, 현 논현동) 묘역에 안장되어 있던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 모녀의 유해 등 모두 15명의 유해를 성해실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전주에서 발굴한 이명서(베드로) · 손선지(베드로)의 유해 일부와 명동 성당 지하 묘지에 있던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의 유해를 성해실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1968년 10월 6일에 거행된 병인 순교자 24위 시복식을 기해 각 교구에서는 순교자 현양 대회 · 성체거동 행사 · 시복 경축 행사 등을 통한 현양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고, 이듬해 9월 21일에 열린 주교 회의 임시 총회에서는 한국 순교 복자 103위의 축일을 9월26일로 단일화하였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 현양 운동은 103위 시성 운동으로 변모하였으며, 1976년 4월에는 주교 회의에서 시성 촉진을 결의하고 그 책임 주교로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주교를 임명함으로써 전교회 차원에서 시성 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중심으로 순교 자료 수집과 정리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각 교구별로 순교 사적지 개발 · 현양 사업 · 사적지 성역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순교자 유해 분배와 유해 순회 기도회도 각 본당 · 교구와 단체 · 기관별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0년 1월 14일 주교 회의 임시 총회에서 구성된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준비위원회’ (위원장 경갑룡 주교)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순교자 현양 운동을 활성화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특히 여기에서는 한국 순교복자들의 시성 추진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선정하고 신자들의 자발적인 현양 운동을 유도하였으며, 1983년 1월부터 전국적으로 ‘한국 순교 복자 유해 순회 기도회’를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수원교구에서는 미리내 · 천진암 등 사적지 개발에 주력하였고, 전주교구에서는 치명자산 개발에 힘쓰면서 1983년에는 복자 정문호(바르톨로메오)와 한재권(요셉)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대전교구에서는 다락골과 해미 · 솔뫼의 사적지 사업을 전개하였고, 원주교구에서는 배론 사적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밖에도 대구대교구 · 마산교구 · 청주교구등에서 사적지 개발을 통한 현양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전국적인 순교자 현양 사업의 결과, 1984년 5월 6일에는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복자 103위가 시성되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 현양 운동은 자발적인 사적지 순례와 순교자 공경 활동으로 이어졌다. 또한 각 교구에 설립된 교회사 연구소들을 중심으로 자료 수집과 연구 활동, 교구 차원의 사적지 개발과 기념관 설립, 교회 창설기의 순교자들과 다른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작업으로 계속되었다. 반면 한편에서는 연구 성과의 집약과 체계적인 현양 사업, 계획적인 사적지개발, 후원 활동 등이 순교자 현양 활동의 확대와 신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게 되었다.
→ 순교 ; 시복 시성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2001. 8권 . pp.5164-5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