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 시성 諡福諡聖
〔라〕 beatificatio, canonizatio
〔영〕 beatification, canonization
교황이 이미 시복(諡福, beatificatio)된 복자(福者)의 이름을 성인 명부(名簿)에 올리고, 온 교회가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도록 선포하는 교황의 확정적 · 무류적 · 최종적 결정.
‘시성’ 이란 말은 그리스어 “카논” (κανών)에서 비롯되었는데, 본래 ‘막대기’ 라는 의미였으나 그 뒤 ‘자’ · ‘규범’ · ‘기준’ 등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따라서 시성이란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하느님 백성의 거룩함(聖性)의 기준을 모범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시복 후보자를 ‘하느님의 종’ (servus Dei)이라고 부르며, 성인이 되기 전에 먼저 복자가 되어야 한다. 이들 중에는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도 있고, 참되고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함으로써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증거자도 있다.
Ⅰ. 역사
순교자 공경은 초대 교회부터였으나, 순교자들에 대한 기념은 다른 죽은 사람들에 대한 기념과는 분명히 구분되어 행해졌다. 즉 죽은 사람들에 대한 기념이 통상적으로 죽은 사람들의 영원한 안식을 비는 기도와 애도로 이루어진 데 비해, 순교자들에 대한 기념은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와 일치한 가운데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전구해 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환희의 정으로 충만했었다. 순교자의 친척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순교일과 그 장소 혹은 순교자의 장례일과 그 장소를 정성스러이 기념하였던 것이다.
그 뒤 로마의 박해가 끝날 무렵, 순교자들에게만 국한되었던 이러한 공경 행위는 비록 신앙을 위해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앙을 옹호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 즉 신앙의 고백자들에게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경의 대상은 특별히 엄격한 생활이나 회개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다간 사람들, 가톨릭 교의에 탁월했던 학자들, 사도적 열정에 불탔던 주교와 선교사들, 그리고 사랑의 정신과 복음정신을 발휘하였던 사람들에게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주교가 주관한 시성〕 6~10세기에는 성인으로 공경받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신자들은 어떤 사람이 높은 성덕(聖德)을 지녔다는 평판(fama sanctitatis)이 나거나 위대한 사랑의 정신을 발휘하였을 경우, 그리고 소문이 날 정도로 기적이 일어났을 경우 쉽게 감격해 했다. 새로운 이름들이 전례력이나 순교록에 첨가되었고 축일의 수도 크게 늘어났으며, 전설적인 내용이 기는 하지만 전기도 쓰여졌다. 그 결과 남용되는 사례가 많아져 제재가 가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중대한 일들은 조절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일종의 관행상의 통일을 보게 되었다. 처음 수 세기 동안에는 한 개인의 성성을 결정짓는 유일한 척도가 그에 대한 평판이었으나, 여기에 교회의 권위 즉 유권(有權) 교구장이 개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뒤부터는 주교가 성덕과 기적에 대해 조사한 후 승인 판결을 하고 시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교황이 주관하는 시성〕 시성의 주관이 주교에서 교황으로 바뀌게 된 것은 시성의 형식적 승인을 교황에게 의뢰하는 관습이 점차 도입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은 교황이 갖고 있는 최고 권위로 인해 교황에 의해 선포되는 시성이 훨씬 큰 영향력이 있는 이유로 급진전되었다. 교황이 주관한 최초의 시성은 교황 베네딕도6세(973~974)가 973년에 거행한 우달리코(Udalicus)의 시성식이었다.
시성 절차가 보다 역사적이고 교의적인 발전을 하게 된 것은 교황 식스토 5세(1585~1590)에 의해서였다. 교황은 1588년 교황령 〈임멘사 에테르니 데이〉(Immmensa Aeterni Dei)를 통하여 교황청 기구가 관장하는 업무를 구분하고, 교황 주관의 시성을 준비하는 작업을 예부성(禮部省, Sacra Congregatio Rittum)에 위임하였다. 이에 예부성은 자체적으로 시성을 위한 심판 방법을 개발하고, 보다 안정되고 통일된 절차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정착시키려는 노력은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 재임 때까지 계속되었다. 1642년 3월 12일 교황 우르바노 8세는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발표된 시성에 관련된 모든 규정과 그에 따른 해설들을 수록한 교령 〈성인들의시복과 시성에서 지켜야 할 규정〉(Decreta servanda in canonizatione et beatificatione sanctorum)을 반포하였다.
그 뒤 당시 추기경이었던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에 의해 예부성에서의 경험들을 모은 논문 〈하느님의 종의 시복과 복자의 시성에 대하여〉(De servorum Deibeatificatione et de beatorum canonizatione, 1734~1738)가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교황 우르바노 8세의 교령을 보완한 것으로, 절차상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웅적 덕성에 대한 근본개념을 밝혀 주었고, 그 후 2세기 동안 예부성의 규준이 되었다. 1914년에는 교황 비오 10세(1903~1914)가 예부성을 전례 담당 부서와 시성 담당 부서로 구분하였고, 1930년에는 교황 비오 11세(1922~1939)에 의해 ‘역사적 안건’ (causa historica)을 전담하는 역사부(歷史部, sectio historica)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자의 교서 〈빛나는 성덕〉(Sanctitas clarior, 1969. 3.19)을 통해 시복 시성의 절차를 간소화한 데 이어 〈예부성〉(Sacra Rituum Congregatio, 1969. 5. 8)이라는 교황령을 통해 예부성 대신에 그 업무를 나눈 전례 성사성과 시성성(諡聖省)을 신설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자의 교서에서는 교황청의 허락 이전에 주교가 준비하는 증거 수집 절차가 유일한 심리 절차가 되도록 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령 〈완덕의 천상 스승〉(Divinus perfectionis magister, 1983. 1. 25)을 통하여 교황 바오로 6세의 개정에 따른 진행 순서를 세부적으로 규정하였다.
Ⅱ. 절차와 의미
〔시복 시성 절차〕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교서 〈천상 예루살렘 시민〉(Caelestis Hierusalem civis, 1634. 7.5)을 통하여 이미 공경해 오던 분들을 시복 시성하는 특별 규정을 마련하였다. 즉 그러한 공경 관례의 기원과 존재 여부만을 재확인한 다음 그들을 지속적으로 공경할 것인지에 대한 여부를 확정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를 마무리지었고, 교황이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를 끝냈다. 이를 “균등한 시복 및 시성” (causa equivalente)이라고 한다.
한편 정식 절차는 ‘시복 후보자’ 에 대한 목격 증인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를 ‘새로운 시복 시성 건’ (causa recentior)이라고 하는데, 이때에는 목격자의 증언을 중심으로 성덕이나 순교에 대한 조사를 한다. 후자의 경우는 ‘옛 시복 시성 건’ (causaantiqua) 또는 ‘역사적 시복 시성 건 (causa historica)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에는 성덕이나 순교 사실을 사료를 통하여 증명하게 된다.
시복 수속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 모범적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던 어떤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 사람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소위 ‘성덕에 대한 평판 이나 하느님을 위하여 용감히 순교한 사람이라는 순교에 대한 평판’ (fama martyrii)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좋은 평판이 확산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에게 전구하면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입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또한 점점 커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유권(有權) 교구장은 이러한 내용들이 타당하다고 사려되면 절차를 밟기 시작한다. 이때 유권 교구장은 후보자의 임종지 교구장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필요하다면 연고지의 다른 교구장도 가능하다.
교구에서의 절차 : 교구장은 먼저 시복 심사 개최를 선포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평가할 적임자를 선정한다.선정된 이들은 실제로 성덕에 대한 평판이나 순교에 대한 평판이 존재하는지 그 여부를 가려내고, 존재할 경우 그 근거와 범위를 알아본다. 고전적 의미의 순교 사실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순교자에게서나 박해자에게서 질료적(質料的)이고 형상적(形的)인 순교 사실이 증명되어야 한다. 순교자측의 질료적 순교란 실제로 죽었음을 의미하고, 형상적 순교란 그 죽음이 신앙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순교한 것을 의미한다. 박해자측의 질료적 순교란 죽인 행위 또는 죽음의 직접 동기가 된 가해 행위를 의미하고, 형상적 순교란 신앙에 대한 증오(inodium fidei)또는 적어도 이러한 증오가 주된 동기가 되어 죽게 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이 문헌이나 목격 증인의 증언을 통하여 인정될 때 순교에 대한 평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또 시복 시성 후보자들의 저술(책, 편지,일기 등) 속에 신앙과 윤리 도덕에 어긋나는 것은 없는지, 공적인 공경의 대상이 된 적은 없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하는데, 이는 시복 시성 후보자가 이미 복자나 성인처럼 공경된 적이 없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공적 공경의 흔적이 있으면 모두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조사 결과가 긍정적이면, 교구장은 이제까지의 진행 과정과 시복 시성 후보자의 생애 및 사건의 중요성 등을 간단히 적어 시성성에 알리고 자문을 청한다. 시성성으로부터 계속해서 진행해도 좋다는 “장애 없음” (nihilobstat)이라는 판정을 받았다면, 교구장은 증인을 심문하고, 앞서 자료를 수집하고 평가한 것에 대한 자료를 심사하는 일에 착수한다. 이와는 별도로 시복 시성 후보자의 전구로 일어났다는 기적에 대한 조사도 진행시킨다. 그리고 모든 조사가 끝나면 조서들의 사본 2부를 작성하여 신학자들의 검열을 거친 뒤, 이들의 소견서를 첨부하여 시성성에 제출한다.
교황청에서의 절차 : 교구장으로부터 시복 시성 관계의 모든 회의록과 문서들을 접수한 시성성은, 우선 주교에 의해 진행된 조사가 합법적이며 유효한지를 심사한다. 만일 이 과정에서 의심이 가는 일이 생기면 성덕이나 순교의 평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평가되면 보고관(relator)에게 맡겨져 시성성의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하게 된다. 보고관은 조사 중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특수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 위원들의심사를 받을 수 있다. 조사가 끝나면 조서에 서명한 후 이를 신학 자문위원회에 보내는데, 신학 자문위원회에서는 ‘신앙 변호인’ (promotor fidei)과 특별 회의에서 토론하기에 앞서 신학적으로 문제되는 점이 없는지 미리 연구하여야 한다. 만일 문제되는 점이 있다면 근본적으로 다시 조사하게 된다.
모든 조사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오면 그 조사 결과를 추기경 및 관계 주교 회의에 이관한다. 그리고 이 회의의 판결이 교황에게 제출되고, 교황은 이제까지의 모든 조사를 인정하는 칙서를 발표한다. 이 칙서가 발표된 후 기적에 대한 심사를 하게 된다. 철저한 조사와 토의 끝에 시복 시성 후보자가 영웅적으로 성덕을 실천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고 순교 사실이 인정되었다고 해도, 교회는 시복에 앞서 기적을 통해 확증을 얻고자 기적 심사를 한다.
기적 심사 :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중에도 많은 기적이 행해졌다. 예수는 하느님의 전능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특별한 은혜가 교회와 복음을 믿고 따르는 충실한 교회의 자녀들에게도 일어날 것이며, 그것으로 그들을 빛나게 해줄 것이라고 하였고 또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기적은 하느님이 장차 복자나 성인이 될 사람과 그의 삶을 인정하신다는 명백한 증거이며, 시복 시성 후보자가 하느님 나라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더욱이 그 기적이 그의 공로로 인해, 즉 그가 하느님 앞에서 강력한 전구자가 되어 줄 것으로 믿는 신자들이 그에게 전구를 청하여 일어났을 경우, 그 기적은 하느님께서 그러한 믿음을 부인하시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믿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
시복 시성 절차를 위해서는, 첫째로 하느님께서 그 기적을 참으로 행하신 것인지, 둘째로 그 기적이 실제로 시복 시성 후보자의 전구로 일어난 것인지를 가려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기적에 대한 조사도 시복 시성의 다른 절차와 비슷하게 진행되는데, 신학적 · 법적 · 역사적 측면의 조사뿐만 아니라 과학적 · 의학적 조사도 뒤따른다. 이러한 종류의 조사는 대단히 엄격하게 진행되며, 이 조사와 평가를 하는 데 있어 교회는 관련 전문가나 심지어 반대자들의 의견도 청취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시복을 위해서는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인정되어야 하나 교황은 그중 한 가지를 관면할 수 있다. 순교자의 경우에는 기적이 모두 관면되기도 한다.
〔시복〕 기적 심사의 결론이 긍정적이면 시복을 하게 되는데, 그 마지막 단계로 교황이 주재하는 추기경 및 관계 주교 회의가 개최된다. 교황은 고문단과 고위 성직자 및 추기경들의 의견을 청취한 다음, 그것이 합당하다고 사려될 경우 교령을 작성하도록 명하고 시복 행사가 거행될 날짜를 택한다. 시복식은 교황이 시복 후보자에게 복자의 칭호를 드리며, 공적 공경을 허락하는 교서를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다음에는 새로 시복된 복자의 초상화 제막식이 거행되고, 장엄하게 감사의 기도를 드린 뒤 교황이 직접 미사를 봉헌한다. 이것이 복자에 대한 최초의 공적인 공경 행위가 되는 것이다.
〔시성〕 시복이 거행된 다음, 복자의 전구로 새로운 기적들이 일어났다는 소식들이 접수되면 시성을 위한 새로운 절차가 시작된다. 성덕이나 순교에 대한 평판의 조사는 시복 때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이때에는 복자들과 연관되었다고 주장되는 기적에 대한 심의만 한다. 이때에도 통상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수많은 토의와 조사 끝에 하느님께서 그 복자의 전구를 통하여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이 증명되면, 교황은 추기경들과 관계 주교들의 회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시성을 결정한다. 수 세기 동안 내려오는 관례에 따라 시성식은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되는 것이 원칙이고, 매우 장엄하게 진행된다. 그렇지만 한국의 103위 시성식은 예외적으로 서울 여의도에서 1984년 5월 6일에 거행되었다. 성인이 되실 분의 초상화를 앞세운 성대한 행렬에 이어 복자를 시성해 주실 것을 간청하는 청원을 하고, 성령께서 임하시도록 기도드린다. 이어서 시성 교서를 낭독하고 장엄하게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교황이 미사를 집전한다. 미사 봉헌 예절에서는 교황께 드리는 상징적인 선물을 드리기도 한다.
〔의미〕 아기들은 시복 시성하지 않는다. 세례를 받고 죄에 물듦이 없었으니 하느님의 영광 중에 살 것이라고는 믿지만, 영웅적인 성덕을 실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성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시복 시성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의 권좌(權座) 앞에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위해 전구해 주기를 청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완덕의 모범을 제시해 주기 위해서이다. 즉 교회는 성인들을 시성함으로써 신자들이 누구에게 전구를 청하며 기도해야 하는지, 또 누구를 성덕의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Ⅲ. 한국에서의 시복 시성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 추진 작업은 박해 시대의 순교자 행적 조사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1984년에 시성된 103위 성인에 관한 시복 시성과 최근의 시복 시성 운동으로 크게 구분해 볼 수있다. 이 중에서 전자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시작한 것으로 목격 증인이 있는 ‘새로운 시복 시성 건’ 에 속하지만, 후자는 한국인에 의해 추진되는 ‘옛 시복 시성 건’ 으로 목격 증인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 자료 및 예비 조사 :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조사는 공식적으로 박해가 시작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즉 1838년 말부터 몇몇 신자들이 체포되자 제2대 조선 교구장 앵베르(L. Imbert, 范世亨) 주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포함한 수기 형식의 박해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이 보고서에는 1838년 12월 31일부터 자신이 체포되기 3일 전인 이듬해 8월 7일(음 7월 2일)까지의 내용이 수록되었다. 뿐만 아니라 앵베르 주교는 체포되기 몇 개월 전부터 정하상(丁夏祥, 바오로)과 현경련(玄敬連, 베네딕다)에게 순교 사적의 정리를 맡겼으며, 이문우(李文祐, 요한) ·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 최영수(崔榮受, 필립보) 등에게도 같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 후 기해박해로 정하상 · 현경련 · 이문우 등이 순교하자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 조사 작업은 최영수 · 현석문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1841년 8월 최영수가 사망한뒤에는 현석문이 이재의(李在誼, 토마스) · 최 베드로 등의 협조를 얻어 3년 동안 노력한 끝에 “귀히년 치명일괴를 완성하였다. 이것이 곧 《괴히일기》의 원본이다. 이후 1845년 초 조선에 일시 귀국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부제는 이를 토대로 라틴어본 <조선 순교자들에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마카오의 리부아(Libois) 신부에게 보냈고, 1846년 조선에 입국한 제3대 조선교구장페레올(Ferréol, 高) 주교는 그 해의 병오박해(丙午迫害)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포함하여 프랑스어본 “증보판 기해일기”를 이듬해 완성하였다. 이 증보판은 곧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고, 1847년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부제와 메스트르(J. Maistre,李) 신부가 그 내용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82명)을 완성하였다.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번역 즉시 파리 외방전교회로 보내졌다. 그러자 파리 외방전교회의 루케(Luquet) 주교는 1847년 10월 15일 이를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제출하였으며, 이 자료는 조선 순교자들의 시복 절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한국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 조사 작업은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에게로 이어졌는데, 그는 보좌 주교가 되기 1년 전인 1856년에 제4대 조선교구장베르뇌 (S.F. 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교회 서적을 번역 · 저술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동시에 한국 순교자 전기를 편찬하는 작업을 위임받았었다. 사실 그는 이에 앞서 한국의 풍습과 역사, 한국의 순교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었으며, 1855년에는 이도기(李道起, 바오로)의 전기를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었다.
순교자 전기의 편찬을 위임받자 다블뤼 주교의 자료수집 작업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857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교황청 수속을 위한 조사를 시작하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이를 시복 수속을 위해 순교자 명단을 새로 제출하라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였다. 그래서 다블뤼 주교는 1785~1846년 사이의 순교자 210명을 선정하여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즉 《다블뤼 비망기》 제5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인 <한국 주요 순교자 선정>을 서둘러 완성하였다. 그리고 1857~1858년에는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과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의 순교 전기와 함께 이를 파리로 보냈으며, 이듬해에는 <보유편> 120쪽을 추가하여 파리로 보냈다.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다블뤼 주교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백서>(帛書)가 수록되어 있는 이기경(李基慶)의 《벽위편》(闢衛編) ,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와 이경도(李景陶, 가롤로)의 옥중 서한을 발견하였다.
이후에도 다블뤼 주교는 자료 수집 작업을 계속하여 1860년까지 《조선사 서설》(즉 《다블뤼 비망기》 제3권)과 《조선 순교사》(즉 《다블뤼 비망기》 제4권)를 완성한 뒤 1862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다. 그러나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작업은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인해 중단되었다. 파리 본부에서는 그 후 다블뤼 주교가 작성한 자료들을 정리한 뒤 1887년에 전사본을 작성하는 한편, 이를 ‘다블뤼 비망기’ 로 분류하였다.
박해 후 기해 · 병오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 조사와 정리 작업은 1876년부터 재개되었으며, 이때 병인박해 순교자에 관한 조사도 병행되었다. 이 작업은 1880년 위텔(G. Mutel, 閔德孝) 신부가 입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 그는 이때 신자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던《괴히일기》 원본의 전사본과 정하상의 <상재상서>, 그리고 천주 가사인 민극가의 <삼세대의>와 이문우의 〈옥중제성> 등을 발견하여 교황청 예부성성으로 보냈다. 또 1890년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후에도 계속 자료조사를 하여 1894년 황사영의 <백서> 원본을 발견하였으며, 흩어져 있는 관변측 자료들을 정리하여 추가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수집 정리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에 관한 자료들은 시복 추진의 바탕이 되었다.
시복 과정 :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절차는 1847년 10월 15일 최양업 신부가 번역한 순교자들의 행적이 교황청 예부성성에 접수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예부성성에서는 박해 중인 한국 천주교회의 실정을 감안하고, 이 행적 자료가 엄격하게 선정 · 정리되었으므로 이것만으로 조사 수속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 결과 1857년 9월 24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의 윤허를 받고 한국 순교자-이때부터 공식적으로는 ‘하느님의 종’ 이라 불림-에 대한 조사 심리를 위한 법령이 제정되었다. 동시에 행적에 수록된 하느님의 종 82명 모두가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고, 정규 절차에서 필요한 ‘정보 조사 의 면제라는 특권이 부여되었으며, 한국 교회에는 교황청 수속을 위한 조사를 시작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어 예부성성에서는 1864년 12월 23일과 1866년 9월 17일에 시복 조사 위임장을 한국 교회로 발송하였으나 박해 때문에 전달되지 못하였다.
박해가 끝난 뒤 자료 조사가 재개되자, 예부성성에서는 1879년 5월 8일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에 아무런 장애가 없음을 선포하였다. 또 한국 교회는 이미 교황청으로부터 조사 위임장을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교구장의 주관 아래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에대한 조사 수속(교구 재판)의 절차와 교황청 수속(교황청재판)의 절차를 동시에 시작하였다. 당시 조사 수속위원회의 판사는 1878년에 부주교로 임명된 블랑(J. Blanc,白圭三) 신부가 맡았으며, 1882년 4월 26일에는 위텔신부가 위임 판사에,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가 기록 서기(書士)에 임명되었다. 위텔 신부는 1880년 한국에 입국하기 이전에 파리 외방전교회와 통킹 등지에서 시복 수속과 관련된 체계적인 교육과 실무 작업을 습득했다. 이후 1885년에는 시복 판사가 푸아넬(V. Poisnel, 朴道行) 신부로 변경되었는데, 그 이유는 뀌텔 신부가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지도자로 임명되어 귀국했기 때문이었다. 이 교회 재판은 1882년 5월 11일에 시작되어 1887년 4월 3일에 종결되었으며, 모두 42명의 목격 증인들이 나와 심문을 받았다.
조사 수속과 교황청 수속이 끝난 뒤, 1899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판사로 임명된 르 장드르(LeGendre, 崔昌根) 신부가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증인 심문 내용을 확인하였으며, 1901년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신부와 위텔 주교가 다시 한번 이를 검토 · 재확인 하였다. 바로 이해 10월 2일에는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 57-1번지)에 있던 앵베르 주교, 모방(P. Mau-bant, 羅) 신부, 샤스탕(J. Chastan, 鄭) 신부의 유해가 발굴되어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졌다. 그런 다음 한국 교회에서는 “기해 · 병오박해 시복 조사 수속록”의 증언 내용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관련 자료를 첨부하여 1905년 7월 26일 예부성성에 제출하였다. 이후 교황청에서는 1910년 7월에 수속록 내용을 심의한 뒤, 그 적법성 즉 ‘교황청 수속의 유효성’ 을 발표하였다.
이어 교황청에서는 1921년에 추기경 회의의 첫 번째 단계인 전(前) 예비 회의를 개최하였고, 1923년 3월에는 예비 회의를, 1924년에는 순교 사실과 기적에 관해심의하는 추기경 본회의를 계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1924년에 하느님의 종 82명 중 17명이 증거 불충분으로 특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가 이듬해 그중 14명의 순교 사실이 추가로 인정되었다. 이어 1925년 5월 10일 어전 회의(coram Sanctissimo) 즉 모든 문제를 재검토하는 투토(Tuto) 회의가 개최되어 여기에서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기적 심사 면제령과 함께 82명 중 정 아가다 · 김바르바라 · 한 안나 등 3명을 제외한 79명의 시복이 확정되었다. 그 결과 같은 해 7월 5일 위텔 주교와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 성직자 · 평신도가 참석한 가운데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1922~1939)에 의해 시복되었다.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 자료 및 예비 조사 :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사는 1876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조사는 처음에 미미하게 진행되다가 1880년위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부터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1882년에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교황청 수속이 시작되면서 병인 순교자들의 시복 수속을 위한 예비조사가 논의되었고, 1884년에는 위텔 신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자료 및 예비 조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블랑 부주교는 1882년 3월 10일(음 1월 21일) 갈매못 순교자 5명 중에서 다블뤼 주교 · 위앵(L. Huin, 闕) 신부 ·오메트르(P. Aumaitre, 吳) 신부 · 장주기(張周基, 요셉) 등 4명의 유해를 남포의 서재골(현 미산면 평라리의 서짓골)에서 발굴하여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옮겼다.
1885년 위텔 신부가 프랑스로 귀국함에 따라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작업은 일시 중단되었다가 1887년에 재개되었다.이어 1890년 위텔 신부가 제8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어 다시 한국에 입국하자 예비 조사 작업이 본격화되었으며 1895년에는 르 장드르 신부에 의해 조사 · 정리된 병인박해 순교자 877명의 전기가 <치명일기》로 간행됨으로써 조사 수속이 시작되었다. 위텔 주교는 《치명일기》가 간행된 후 이를 전국의 본당에 배포하여 보완 증거와 누락된 순교자들에 대한 전기를 추가로 수집하였다.
시복 과정 :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수속은교구 재판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위텔 주교는 1899년에 르 장드르 신부를 위임 판사에,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신부를 시복 조사 청원자에, 홍병철(洪秉喆, 루가) 부제를 서기로 임명하여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 해 6월 19일부터 증인이 거주하는 지역별로 재판을 시작하여 이듬해 11월 30일 100명의 증인을 대상으로 135회에 걸쳐 이루어진 재판을 종결하고, 1901년에 병인박해 순교자 29위의 “병인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전 10책)을 예부성성에 제출하였다. 한편 이에 앞서 1899년 10월 30일에는 왜고개(瓦峴, 현 용산구 한강로 3가)에안장되어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J. Bretenières, 白) 신부, 볼리외(B. Beaulieu, 徐沒禮) 신부, 도리(P. Dorie, 金) 신부, 프티니콜라(M. Petitnicolas, 朴) 신부, 푸르티에(C. Pourthie, 申妖案) 신부, 그리고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 7명의 유해가 용산 신학교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들의 유해가 신학교로 옮겨져 안치되어 있던 갈매못 순교자들의 유해와 함께 다시 1900년 9월 5일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졌다.
예부성성에서는 수속록을 검토한 뒤 1914년 5월 13일 이를 승인하였으며,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2)는 1918년 11월 13일 시복 건의 개시를 허락하였다. 이때 교황청에서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건을 코친차이나(현 베트남 남부) 순교자들의 시복 건과 한데 묶어 추진하였다. 그리고 예부성성에서는 1919년 7월 29일 교황청 수속을 위한 교회 재판, 즉 교황청 재판을 서울교구에 위임하였다. 이때 29명 가운데 증거가 불충분한 이성천 · 이성욱 · 송성보 등이 하느님의 종에서 탈락되어 26명이 가경자로 확정되었다.
이후 교구장 위텔 주교는 2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드브레(E. Devred, 俞世竣 보좌 주교를 시복 판사 로 임명하였고, 1921년 2월 12일부터 1926년 3월 18일까지 129회에 걸쳐 85명의 증인들을 대상으로 교황청 재판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1923년 2월에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 신부에 의해 평양 논재(대동군 율리면 沓峴里)에 안장되어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 유정률(劉正律, 베드로)의 묘가 조사되었고, 6~8월에는 드브레 주교와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신부에 의해 고산 다리실(천호)과 전주 막고개(완주군 소양면 유상리), 진안 모시골(진안군 어은동)에 묻혔다는 순교자 이명서(베드로)와 손선지(베드로) 등의 묘가 조사되었다. 또 드브레 주교는 그 동안의 자료를 정리하여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을 완성하였고, 1925년에는 이 밖의 추가 증언 자료들을 모아 《병인박해 치명사적》(현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으로 정리하였다.
교황청 재판 기록은 모두 8권으로 제책되어 교황청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교황청에서는 1952년 3월 2일에서야 그 유효성을 인정하였고, 1962년 5월 4일에는 26위의 시복 수속이 코친 차이나 순교자들의 시복 건과 분리되었다. 그 동안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기해 · 병오박해순교자 79위의 시복식이 있은 뒤인 1927년 5월 경기도 구산에서 복자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의 유해를 발굴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으며, 1928년에는 복자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수리산에서 발굴하여 김성우의 유해와 함께 명동 성당으로 옮겼다. 또1938년에는 시흥 봉천(현 서울의 봉천동)에서 복녀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과 두 딸인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와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의 유해를 발굴하여 언구비 교회 묘지(현 서울시 논현동)로 이장하였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한국 주교단은 11월 10일 교황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종 26명이 병인 순교 100주년이 되는 1966년에 시복될 수 있도록 청원하였다. 이어 1964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장의 요청으로 26명 중에서 푸르티에 신부가 제외되었다. 이듬해에는 시성성의 검사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1966년에 시복 신청인 단테(J. Dante) 변호사의 답변이 있었고, 1967년 1월 10일에 개최된 추기경 회의의 전 예비 회의에서는 이를 근거로 프티니콜라 신부를 제외함으로써 하느님의 종은 24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어 1968년 1월 30일 예비 회의가 개최되었고, 2월 29일에는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가 24위의 순교 사실을 인정하였으며, 7월 4일에는 어전 회의에서 기적 심사 면제령이 반포되었다. 그 결과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24위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한국 순교 복자 103위 시성〕 한국 순교 복자 103위의 시성 추진은 시복 이후의 현양 운동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1971년 12월 13~17일에 열린 주교 회의에서 이 문제가 정식 안건으로 채택되었지만, 연구 과제로 미루어지면서 본격적인 시성 작업이 추진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1975년 9월 13일에 열린 전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에서는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과 103위 복자의 시성을 위한 후원 활동과 현양 사업을 전국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의하였으며, 10월 28일에는 시복 시성을 위한 자문 위원들을 위촉하였다. 그러자 1976년 4월 21 ~23일에 열린 주교 회의 춘계 정기 총회에서는 한국 주교들의 연명으로 작성한 103위 복자들의 시성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함과 동시에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주교를 시복 시성 촉진 책임 주교로 선출하였다.
103위 시성 추진과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 추진 운동은 이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주교 회의에 서는 시성 추진을 위한 기도문을 전국 본당에 배포하였고, 김남수 주교는 1977년 10월 13일 로마 유학 중인 박준영(루도비코) 신부를 로마 주재 법정 대리인으로 임명하여 11월 7일 시성성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 이듬해 4월 13일에는 한국 복자 103위의 시성 건이 시성성에 정식으로 접수되어 교황 바오로 6세의 윤허를 받았다. 1980년 7월 17일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준비위원회에서 시성 추진을 200주년 기념 사업의 핵심 사업으로 입안하였고, 11월 17일에는 변기영(베드로)신부가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의 실무 책임을 담당할 총무로 임명되었다. 1982년 6월 18일에는 박준영 신부 후임으로 김진석(마태오) 신부가 로마 주재 법정 대리인으로 임명되어 시성성의 승인을 받았다.
한편 1982년 5월 28일 한국 주교 회의에서는 시성의 요건인 ‘기적 관면’ 을 시성성에 요청하였으나, 시성성에서는 기적이 있어야 한다는 답변을 보내 왔다. 같은 해 9월 9일에는 제1차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가 개최되었고, 초기 교회 순교자 중에서 우선 22명을 선정하여 조사와 약전 작성을 전문가들에게 의뢰하였다. 또 주교단에서는 200주년 기념 행사에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도록 추진함과 동시에 이때 시성식이 함께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을 교황청에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은 같은 해 11월 19일 로마의 추기경 회의에 참석한 뒤 교황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주교단의 의사를 전달하였으며, 교황으로부터 방한을 희망한다는 확답을 얻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 총무인 변기영 신부는 1983년 2월 12일 교황청 시성성 차관으로부터 한국 주교단의 이름으로 기적 관면 청원서를 다시 한번 교황청에 제출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얻었다. 이에 한국 주교단에서는 3월 5일 ‘기적 관면 청원서’ 를 작성한 뒤, 교황 대사 몬테리시(F. Monterisi) 대주교의 추천서를 첨부하여 3월 24일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그 결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6월 7일자로 시성성 장관의 제청과 추기경 회의 의견을 참작하여 기적 심사 관면을 허락함으로써, 한국 순교 복자 103위의 시성에서 가장 중요한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83년 1월 28일부터 순교자 유해의 순회 기도를 시작하였으며, 3월 7일에는 윤민구(도미니코) 신부가 김진석 신부의 뒤를 이어 로마 주재 법정 대리인에 임명되었다.
한국의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에서는 1983년 7월 13일 주교단 17명의 연서로 시성식 장소를 한국으로 정해줄 것과, 동시에 시성 청원서의 제목을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와 102위 동료 한국 순교자들”로 변경해 줄 것을교황에게 청원하였다.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9월 27일의 특별 회의에서 한국 순교 복자 103위의 시성을 승인 · 선포하였으며, 10월 29일에는 한국 주교단에서 요청한 두 가지의 청원을 수락하였다. 그리고 시성성에서는 11월 7일, 이미 10월 25일자로 한국 순교 성인의 축일 명칭을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로 결정하였음을 한국 주교단에 통보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3일 한국을 최초로 방문하였고, 5월 6일에는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시성식을 집전하였다. 아비농 교황 시대 이후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 밖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시성식이었다.
〔현재의 시복 시성 추진〕 20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의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에서는 103위의 시성과 함께 기해박해 이전의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운동을 함께 추진하였었다. 그러나 103위 시성식이 먼저인데다가 시성식마저 늦어질 것을 염려하여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 운동은 중단되었다. 이에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에서는 다시 초기 순교자들 98명에 대한 시복 운동을 시작하였고, 그 안에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순교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일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1985년 5월 20일 주교 회의 전례위원회에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98위”에대한 시복 · 시성 운동을 인준받음과 동시에 추진 위원을 위촉하였다. 이후 추진위원회에서는 대상 순교자를 조정하여 그 청원서와 약전을 교황청에 제출하였지만, 본래 의도한 결실을 얻지는 못하였다. 당시는 교황청에서 이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령 <완덕의 천상 스승>(Divinus Perfectionis Magister, 1983. 1. 25)과 시성성의 시행령 <주교들이 행할 예비 심사에서 지킬 규칙>(1983. 2. 7) 이 발표된 상태였으므로,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 추진은 이 특별법에 따라 추진되어야만 하였다.
200주년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가 결실을 얻지 못하고 해체되자, 전주교구에서는 1985년부터 교구 독자적으로 시복 시성을 추진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7년 10월 20일 시복 청원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윤지충(바오로) 등 5명의 순교자들을시 추진 대상자인 ‘하느님의 종’ 으로 선정하였다. 동시에 전 교구차원에서 시복 시성 기도를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9월 19일에는 교황청의 특별법에 따라 시복 시성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어 이 위원회에서는 <5인 순교자 시복 시성 청원서>를 작성한 뒤 주교 회의 전례 위원장의 추천서를 첨부하여 1989년 2월 14일 교황청에 발송하였고, 그 결과 교황청 시성성 장관의 명의로 “하느님의 종 5명의 시성 청원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는 답변을 받게 되었다.
이 밖에도 청주 · 대구 · 수원 · 제주 · 부산교구에서도 시복 시성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우선 청주교구에서는 1995년부터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 시성을 추진하면서 관련 자료집들을 간행하고 자발적인 현양 운동을 시작하였다. 또 대구대교구와 부산교구에서도 을해박해(1815) · 정해박해(1827) · 병인박해(1866 이후)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와 함께 시복 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수원교구에서는 1996년에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추진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윤민구 신부를 주관 신부로 임명하였으며, 2월 7일에는 초기 순교자들을 위한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의 역사 위원들을 임명하였다. 그런 다음 윤유일(尹有-, 바오로) 등 8명의 순교자들을 1차 청원자로 확정하고 <하느님의 종 8위의 시복 시성 청원서>를 교황청에 발송하여, 그 해 10월 1일 시성성으로부터 “하느님의 종 8명에 대한 시복 조사를 착수하는 데 어떤 장애도 없다” 는 회답 공문을 받았다. 최근에는 제주교구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에 대한 시복 시성을 추진하기 위하여 2000년 4월 10일 허승조(바오로) 신부를 위원장으로 하는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교구 차원의 자발적인 현양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각 교구별로 시복 시성 추진 운동이 전개되면서 주교 회의에서는 이를 통합 추진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동안 결실을 보지 못하다가 1999년부터 이 문제를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하였고, 2000년 가을 정기 총회에서 9개 교구의 시복 시성작업을 통합 추진할 청구인(actor)에 주교 회의 사무 총장 김종수(요한) 신부를, 청원인(postulator)에 배티 성지담임 류한영(베드로) 신부를 임명하였다.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초석이 놓여졌다. 그러나 현재의 시복 시성 작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주교 회의의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후원은 물론 전문가에 의한 순교자와 증언자의 엄격한 선정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초기 교회의 순교자와 병인박해 이후의 순교자들을 구분·조정하는 일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교구의 적극적인 동참과 자발적인 현양 운동을 유도해 나가는 일도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 가경자 ; 복자 ; 성인 ; 성인 공경 ; 순교자 현양 운동 ; 시복 시성 운동 ; 시성성 ; 한국 성인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2001. 8권 . pp.5326-5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