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속에서 노년을,
노년 속에서 철학을 바라보다

노년 하면 흔히 질병, 고립, 빈곤, 우울, 죽음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또한 오늘날 노인 계층은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가진 존재로 존경받기보다는 사회적 부담이 되는 존재로 여겨지거나, 때로는 혐오나 학대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노년은 언젠가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보편적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은폐 또는 외면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영국의 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많은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원하면서 늙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라며 노년에 대한 사람들의 이중적 태도를 꼬집기도 했다.

최근 한국도 초고령 사회(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이 20퍼센트 이상인 사회)로 진입하게 되면서 노년의 삶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커져 가고 있다. 그러나 그 관심의 초점은 주로 사회복지 차원이나 기타 정책적 측면에 맞추어져 있다. 반면 그러한 가시적이고 실질적 차원의 근본 바탕이 될 수 있는, 노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여전히 많이 빈약해 보인다. 해외의 사정도 마찬가지로, 『노년론』을 쓴 고대의 키케로와 『노년』을 쓴 현대의 시몬 드 보부아르를 제외하면 노년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보여 주는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이에 노년을 철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밝혀 보고자 국내 아홉 명의 서양철학 연구자들이 의기투합했다. 이 책은 3년 동안 꾸준히 진행해 온 이들의 공동 연구의 결과물로서, 그간 담론의 장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노년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인문적 탐색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다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노년이 과연 무엇이고,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시기와 다른 점은 무엇인지 등 노년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한 다음, 이에 기반하여 과연 어떤 방식의 노년이 바람직한지 규범적, 실천적 지침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우선 철학사 속에 숨어 있던 노년에 대한 사유를 추적했는데, 이것이 1부의 내용을 이룬다. 1부에서는 키케로, 보부아르를 비롯하여 데카르트의 기계론, 게오르크 헤겔의 사변적 자연철학,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의지 형이상학에 담겨 있는 노년에 대한 견해를 만날 수 있다.

가령 키케로는 흔히 인생의 비극으로 간주되기 쉬운 노년에 대한 대반전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흔히 노년에는 질병으로 고통스럽고, 신체적 쾌락이 감소하며, 지위와 역할도 추락하고,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찬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키케로는 노년의 신체적, 정신적 질병은 이전에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일 수 있으며, 노년에도 적당한 운동과 식이요법과 절제를 통해 예전의 체력을 상당히 유지할 수 있고 배움의 활동을 통해 정신적 건강을 증강시킬 수 있다고 여러 예를 들며 반박한다. 또한 노인은 삶의 지혜를 전수해 줌으로써 사회에서 교육자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젊었을 때부터 죽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삶의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이라면 불안과 공포에 눌리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개체의 탄생과 성장과 노화와 죽음을 ‘맹목적 의지’의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이에 따르면 다른 존재자들과 차별되는 인간 고유의 실존적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인생의 쇠퇴기로 간주되는 노년기가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맹목적 의지의 부정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기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유년기나 청년기와는 달리 인간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환상, 미망, 편견에서 해방되어 사물을 냉철하게 파악할 수 있는 통찰을 얻게 된다고 강조했다.

노년에 관한 보기 드문 철학서를 쓴 보부아르는 노년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키케로나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인류 역사 내내 노인의 처지는 대개 비참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녀는 노인을 홀대해 온 문명 전체를 비판하면서도 노년에 대한 어떤 적극적 개념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노년의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노년을 예찬한 키케로와는 상반되는 시각을 드러내었다. 결국 그녀는 “젊을 때와 똑같이 살라, 마치 늙음이 없는 것처럼”을 노년의 삶에 대한 처방으로 제안한다. 필자는 이러한 결론이 삶의 의미란 미래를 향한 기투에 있다고 여기는 보부아르의 실존주의 철학이 도달한 일관된 결론이라는 점과, 동시에 그것이 어떤 자기모순에 빠지는지를 짚어 본다.

이 책의 2부에서는 자연과학적 노화 이론, 노년과 서사적 정체성, 폴 리쾨르의 서사적 시간, 존 로크의 인격 동일성 이론, 데이비드 흄의 발전적 감성 개념, 행화주의 감정 이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효 개념, 존 스튜어트 밀의 대의 정부론 등을 통해 노년을 다각도로 바라보면서 어떤 방식의 노년이 바람직한지 방향성을 제시한다. 먼저 6장에서는 노화 현상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여러 시도를 일별하면서 그중에서도 ‘노화는 세포의 상해와 손상에 대응하는 손상 복구 기제가 과로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한 데이비드 싱클레어의 정보 이론에 주목한다. 싱클레어에 따르면 노화란 현재의 자기와 미래의 자기 사이에서 생명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와 관련된 문제다. 7장에서는 노년의 고유하고 본질적인 가치를 이야기 정체성 혹은 서사적 정체성에서 찾는다. 노년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나’는 누구인지를 묻고 정체성을 재정립하게 되는 시기로, 그것은 나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서사적 정체성은 나이 듦을 단순한 생물학적 변화나 사건이 아니라 자기 해석의 창조적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고 필자는 말한다. 8장에서는 노년이 마주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밝힌다. 노년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시선의 바탕에는 연대기적 시간관이 놓여 있는데, 필자는 주관적 시간과 객관적 시간을 이야기를 통해 매개할 수 있다고 보는 리쾨르의 서사적 시간관을 통해 유한성을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9장에서는 마고라는 인지증 환자의 사례를 통해 노년의 인격 동일성 문제를 다루며, 10장에서는 창조적 노화 모델을 통해 노화의 장점에 주목하는데, 그중에서도 ‘지혜’를 꼽는다. 11장에서는 노년의 우울에 대해 다루며, 12장에서는 현대의 효 개념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효 개념을 통해 살펴본다. 13장에서는 오늘날 선거 제도 안에서 노년층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증대됨으로써 민주주의 체제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현상인 실버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룬다.

노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단순히 노인을 위해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표 필자인 임건태는 서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칠 줄 모르고 앞으로만 치달으면서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던 젊은 층이 주도해 온 문명이 앞으로 계속 존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로의 전향이 절실하며, 이런 전향을 위해서 인간의 한계와 제한성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새롭게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는 원천은 노년의 삶에서 드러나는 유한성을 포용하는 지혜가 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제 여기 내놓는 작은 책이 이 같은 지혜의 중요성을 널리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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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Author

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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