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적 사유와 정치의 공공성: 귀신의 공공성을 정치의 공공성으로

정약용의 정치사상에서 독특한 점은 그가 현실 정치의 공공성을 제고하기 위해 상제-귀신론과 같은 초월적, 형이상학적 사유를 동원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그의 상제-귀신론이 다산의 정치 사유에서도 핵심이라는 점을 밝힌다.
다산은 하늘의 영역에서 상제・천신・인귀의 형이상학적 위계질서를 제시함과 동시에 현실 세계에서 인군・인신・만민의 정치적 위계를 동일한 논리로 구조화했다. 그리고 상제의 신하로서 천지의 명신과 인귀(조상혼)가 공덕으로 하늘에서 존경받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군주와 목민관이 천신과 인귀의 공덕을 민에게 베풀어야 할 의무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조상제사를 시작으로 천신과 상제에게 이르는 의례의 전 과정을 복원하고 상제-귀신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설계한 것은 정약용이 지향했던 세속 정치의 공공성을 제고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 효제자의 인륜 질서 회복과 왕도 정치 구현이 다산 정치론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다산의 사유에서 귀신의 공공성은 정치의 공공성을 위한 사상적 배경으로 기능하였다.

『경세유표』와 개혁 구상

정약용의 『경세유표』는 『주례』를 정치개혁의 중요한 이론적 전거로 삼아 『조선경국전』과 『경국대전』의 이념과 체제를 비판적으로 계승한다.
정약용은 『주례』와 『상서』를 다시 해석하면서 중앙정부의 구조와 역할을 재정비했다. 그는 재상 1인이 아니라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삼공과 도찬성・좌찬성・우찬성의 삼고가 육관의 모든 관리를 총괄하게 했다. 『경세유표』에서 다산이 군주에게 허용한 권한은 인재 선발, 관리 임면과 고적(考績)의 범위에 한정된다. 다산은 승정원을 천관 이조에 예속시켰고 왕실 업무를 담당하던 여러 관서를 육조에 분산, 배치했으며, 친위병과 군영아문을 모두 병조 산하에 배속시킴으로써 일체의 국왕 관련 직속 기구들을 없애버렸다. 또한 규장각도 왕의 사적 근신을 육성할 위험이 있으므로 혁파하라고 주장했다. 다산은 국왕도 새로 정비된 관료제 시스템에 철저히 예속되도록 국가기구를 편성함으로써 정도전 이래 사대부들이 추구한 왕권 견제와 균형의 정점을 이론적으로 구현했다. 또한 고위 관리를 포함한 모든 관리에 대해 인사고과제(고적제)를 실시하여 거대 권력기관들이 상호 평가하게 함으로써 국정 운영에서 소수의 능력 있는 자들이 전횡을 일삼지 못하도록 세밀하게 정부 조직을 재편성했다.
다산은 중인, 서얼, 부민 등 아래로부터 공적이 있는 인재들을 뽑아 올려서 국가기관의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인재 선발과 관리 운영의 공정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젊은 날 작성한 「원목」과 「탕론」에서부터 주목했던 민심에 기반한 위정자 추대론이 구체적으로 자신의 경세서 안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예의 위계질서와 사족 중심 명분론

유학적 세계관에서 예는 덕을 구현하는 수단이며, 기본적으로 신분 질서를 구분 짓고 구성원을 차등화하는 정치적 서열의 기제다. 정약용이 활동하던 조선 후기의 예는 상하, 귀천, 존비를 나누고 군신, 부부, 노주의 명분을 엄격히 구별함으로써 차별의 논리로 기능했다. 다산이 엘리트 사족층의 특권과 역할을 중시했던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다산은 광의의 사족, 나아가 관직자 사대부가 중요한 정치 주체라고 생각했다. 유배기 때도 다산은 사대부의 자의식을 갖고 글을 썼다. 그는 사대부가 단순히 왕의 근신이나 측근이 아니라 국정의 중요한 동반자이며 국왕이 국정 운영의 이상과 가치를 배우는 정치적 스승이라고 보았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다산이 중시한 사족은 민중과 차별적인 특권을 지닌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다. 다만 조선의 사족층은 최고 권력인 왕권을 견제하고 통제하는 중요한 정치적 순기능도 가졌다. 이 점에서 사족의 정치적 책임과 정치의 공공성에 대한 기여를 신뢰했던 다산의 의중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산은 국역과 조세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책임감 있는 사족을 내세웠다. 그가 지목한 사족은 양민이 지는 모든 국역에 동참하고 납세에 철저해야 한다. 특히 다산이 병농 일치의 군제를 개편할 때 사족은 아홉 직역인 구직(九職)에 포함되어 군역(軍役)을 지는 존재로 묘사한다.

효제자와 인륜 공동체: 정치의 공적 가치 구현

다산이 주목한 정치의 공공성은 부모형제자 인륜 관계의 공적 토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심을 본능적 감정으로 보지 않았고 부모 자식을 사적 친밀함이 아닌 공적 인륜 관계의 시작으로 해석했다. 다산이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정당한 원망을 인정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부모에 대한 효심을 부모 자신을 넘어 부모가 친애하고 아끼던 이들에 대한 돌봄과 보호로 확장시켰다. 부모의 삶 이후에도 부모가 염려하던 이들을 같이 돌보기 위해 지역에서는 목민관과 민이 함께하는 각종 항례가 정기적으로 거행되었다. 『목민심서』 「애민(愛民)」의 양로(養老), 자유(慈幼), 진궁(振窮), 애상(哀喪), 관질(寬疾), 구재(救災) 정책을 통해 다산은 지역의 노인과 고아, 어린이, 빈궁하고 가난한 자, 질환자를 구제하고 재난에 함께 대비하는 방책을 상세히 소개한다. 다산은 태학(太學, 성균관)에서 거행한 대표적인 세 가지 의례[三禮], 즉 노인을 공경하는 양로와 연장자를 공경하는 치학(齒學)의 예, 나라와 지역의 고아를 구휼하는 휼고(恤孤)의 예를 중시했고, 이를 지방 목민관이 향교에서 시행하도록 권고한다.
이는 효제의 가족적 원리를 일상의 공동체로 확장한 행위였다. 그는 지역의 향례가 효제의 정감과 원리를 혈연 가족 너머 더 넓은 인륜 공동체로 확장함으로써 정치의 공적 가치를 구현하는 중요한 의례로 기능한다고 믿었다.

다산의 유교 문명론과 조선의 정치 구상

정약용의 정치사상을 관통하는 핵심 표제어는 공(公)이다. 다산은 효제의 공적 가치와 기능을 숙고함으로써 가정의 공공성이 정치의 공공성의 토대가 되도록 했다. 다산의 사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나와 타인이 함께 사는 삶의 공공성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우리는 공적 의제를 제시하고 서로 의견을 조율하며 함께 공동의 가치를 만들어감으로써 오래된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우리는 전통을 숙고해야 하고 이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합당한 윤리와 새로운 질서를 성찰하는 것은 미래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필수적인 과제이다. 정약용은 효제자 인륜을 유교 공동체의 덕목으로 제시했고 민중의 자발적인 배움과 노력이 그들을 윤리적 주체로 성장하게 하는 토대라고 믿었다. 20세기 접어들어 지역 향민들은 지방자치를 일궈온 정치 주제로 재조명된다. 지금도 지역 활동과 연대는 중앙 패권, 관주도형 통제를 넘어서는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자 활력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은 정약용이 내다본 문명한 미래, 평화 공동체로서 동아시아에 대한 전망과 혜안이다. 무력을 쓰지 않고 폭력을 억제하면서 서로 다른 이민족이 함께 사는 화평한 세상, 인간 삶의 이상적 모습인 인문이 밝게 드러나는 문명의 세계, 다산이 유교 문명론과 조선의 정치 구상을 통해 만들고 싶었던 앞서간 미래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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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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