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시대의 기시감, 개발독재의 유령, 파시즘적 정동이 되살아나는 지금, 우리는 진보의 길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철학자 이정우는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에서 이러한 역사적 퇴행을 단순한 후퇴가 아닌 ‘반복’의 문제로 사유하며, 반복 속에서도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 내는 주체적 실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시간의 종합’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중심으로, 과거가 어떻게 되풀이되는가를 넘어 그 되풀이 속에서 진보가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반복과 차이, 사건과 기억, 주체화의 문제를 통해 진보를 다시 사유하려는 이 책은, 진보가 자동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힌다.
진보의 조건을 모색하는 것은 새로운 윤리적·존재론적 관점을 요청한다. 저자는 ‘되기’라는 생성의 개념을 통해 여성-되기, 노동자-되기, 소수자-되기 같은 운동이 어떻게 진보의 동력이 될 수 있는가를 짚는다. 이는 주어진 동일성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새롭게 구성하려는 실천이다. 책 후반부에서는 들뢰즈의 ‘다양체’ 개념을 바탕으로, 진보를 하나의 이념이나 통일된 계급의 이름이 아닌 이질적인 흐름들이 접속하면서 형성되는 생성의 장으로 재정의한다. 철학과 현실, 존재론과 정치학을 횡단하며 진보의 의미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묻는 저자의 시도는 오늘의 반복을 감지하고 새로운 배치를 기획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의 발판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