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연대 제1대대 소요사건은 1946년 5월 23일 제1연대 제1대대 사병들이 연병장에 모여 데모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영등포 보급중대에서 차량 2대 분량의 보급품을 부정처분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경비대 창설이래 누적되어 온 각종 불만과 사상적 대립이 외부로 표출된 것이었다.
제1연대는 창설 초기부터 대내에 계급 불만과 함께 대원간의 좌·우파 대립이 존재하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격화되었다. 계급 불만은 사병들에게 계급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당시 사병 모집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자나 군사경력자, 구제(舊制) 중학교 이상 졸업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들은 제각기 긍지를 갖고 있었으며, 장교를 모집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도 많았다. 그런데 상병 계급을 부여한다는 것을 알고 내무반장을 집단 구타하거나 탈영하는 자가 속출했다.
그리고 대내의 좌․우 대립은 신병 모집 당시 미 군정청의 방침에 따라 사상검열 없이 신체검사와 구두시험만으로 모집했기 때문에 경찰의 수배를 피해 좌익세력들이 대거 입대하여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연대내에서는 신탁통치문제를 놓고 갈등이 격화되면서 좌·우익간에 주도권 싸움이 심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하극상 사건이 바로 제1연대 제1대대 소요사건이다.
사건은 1946년 5월 23일 점심식사 직후에 발생했다. 점심식사를 마친 각 중대 사병들이 연병장에 집합하자 하사관들이 지휘대에 올라가 영등포 근무중대의 장교 2명이 차량과 보급품을 민간인에게 빼돌려 거액을 착복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구속을 요구했다. 또 입대 이래 품고 있던 불평불만을 하나하나 들추어내어 개선할 것을 요구하고 장교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대대주번사령 겸 선임중대장이던 정일권(丁一權) 정위(正尉)가 사병들 앞에 나서서 불평불만이 있으면 정정당당히 상관에게 건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장교들에 대해 불만이 컸던 병사들은 이성을 잃고서 “너도 물러가라”고 하면서 거세게 반발하였다.
마침 이날은 토요일이라 대대장 이하 장교들이 점심 식사 후 모두 외출한 상태였다. 이에 경비대총사령관인 베로스(Russel D. Barros) 중령은 사태의 위급함을 느끼고 일부 미군들을 출동시켜 대기시키는 동시에 사병들 앞에 나가 요구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대표자를 선출할 것을 요구하고 사병대표들과 회담할 장소를 약속한 후 해산시켰다. 그 후 사병 대표 5~7명이 약속 장소에 나타났을 때 베로스 중령은 곧바로 이들을 경비대총사령부 안에 연금(軟禁)시켰다. 이렇게 되자 하사관들은 교섭현장에 입회하고 있던 B중대장 정일권 정위와 대대부관 강문봉(姜文奉) 부위(副尉)의 숙소로 몰려가 항의하면서 숙소의 전구를 깨는 등 7~8시간 동안 난동을 부린 후 자정을 넘어서 해산하였다.
연병장에서의 데모주동자들과 지휘관 숙소에서 난동을 부린 주모자 및 폭행가담자 20여명은 경비대사령부에 구금되어 미 제24군단의 가스 소령에 의해 조사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대장 채병덕(蔡秉德) 참령(參領)은 사건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건 다음날인 5월 24일 아침에 건강이 나빠 자택에서 정양(靜養) 중이던 최경록 참위를 찾아가 “너희 A중대에서 난동사건이 일어났는데 어찌된 일이냐”고 따져 물었다고 하는 사실로 미루어 대대장은 사건의 전말을 몰랐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해 몇 명의 장교들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의심을 받았다. 우선 제1대대 근무중대장이던 장석윤(張錫倫) 정위가 유력하게 거론되었다.이는 소요사건이 근무중대 장교 2명의 횡령사건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무중대 책임자였던 중대장이 의도적으로 부대에 출근하지 않은 채 집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통위부 고문이던 이응준(李應俊)은 장석윤을 찾아가 사건 수습을 적극 독려하였으나 장석윤은 입을 다문 채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 출신의 대선배인 이응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장석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 큰 오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장석윤이 직접 소요사건을 배후 조종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다만 이와 같은 장석윤의 행동이 인사문제에 불만을 가진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제1대대 창설 당시 장석윤은 이응준의 추천을 받아 초대 대대장에 내정되었으나 미군 측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미군측은 일본군 소령 출신인 채병덕을 제쳐놓고 예비역 중위였던 사람을 대대장으로 선임할 수 없다는 점을 주요 반대 이유로 내세웠다. 이렇듯 미군측의 반대에 부딪힌 장석윤은 일본 육사 후배인
채병덕에게 밀린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일 보급중대의 주번사관이었던 유흥수(劉興守) 참위도 배후조종자로 주목받았다. 유흥수 참위는 사병들의 연병장 데모 이후 대대장 이하 간부들이 3/4톤 차량으로 퇴근하면서 대대부관인 강문봉 부위로부터 주번사령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유흥수 참위는 사건이 발생하자 사건 진압에 전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번사령이었다는 이유로 배후 조종 혐의를 받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후에 유흥수는 “사건 주동자들이 좌익계로서 똑똑한 장교들을 배척하기 위한 책동의 일환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광복군 출신인 이성가(李成佳) 부위와 유해준(兪海濬) 부위도 만주군 출신 장교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이러한 오해는 광복군측에서 일본군이나 만 주군 출신자들을 친일파로 낙인 찍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인가 약점이 있으면 그것을 내세워 일본군․만주군계를 축출하려고 기도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배후 세력으로 지목될 만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제외된 장교들도 있었다. 당시 좌익계 인사로 분류되던 이병주(李丙冑) 정위와 이상진(李尙振) 부위가 그들이었다. 이들은 사건을 배후에서 직접 조종했다는 명백한 근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만 하더라도 좌익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피해자 입장에서 그대로 중대장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군내 최초의 하극상 사건인 제1연대 제1대대 소요 사건은 경비대사령부로 연행된 20명의 사건 주동자 중 대부분 석방되고 핵심 인물로 분류된 하영수(河榮壽), 위재설(魏在卨), 이광윤, 홍관표(洪官杓), 김동훈(金東勳) 등 5명만이 미군정 재판에 회부되어 2~5년형을 선고받고 종결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해 대대장 채병덕 참령은 보급부대장으로, 정일권 중대장은 제4연대 대대장으로 각각 전출되었으며, 보급품을 부정처분한 2명의 장교는 파면되었다.
이와 같이 일부 하사관들의 구속과 지휘관들의 전출로 제1연대사건은 일단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당국의 경비대 관련 정책과 경비대 간부들의 지휘 통솔 방식 등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다. 즉 미군정당국의 ‘불편부당’ 방침은 경비대내로 좌익세력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였으며, 경비대 내에서 좌·우 갈등을 증폭시키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경비대 간부들의 일본군대나 만주군대식 통솔방법은 대원들의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적절하지 못한 방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생 경비대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이 후 군내 각종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