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교사상

1. 유학의 한국적 전개

(1)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고구려, 백제, 신라 각국에는 원시 유학에 나타나는 효제충신의 윤리와 경학 그리고 전장(典章) 제도로 지능화 된 한대 유학이 들어와 정치의 이념 및 교육 제도 등 여러 방면에서 기능하였다. 특히 신라는 우리의 고유 정신에 윈시 유학의 도덕 실천 정신과 불교 및 도교 를 접목시켜 화랑도를 탄생시켰다.

 

(2) 통일신라

통일신라의 유학은 원시 유학의 인의(仁義) · 효제충신(孝悌忠信) 등 도덕 정신과 중국의 한대 이후 이어온 경학 사상에 당대(唐代)의 사장학(문장의 화려함을 추구)까지 곁들여진 대단한 규모의 유학이었다. 유학의 도덕 이념은 국학(國學)의 설치와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의 실시 등을 통해 국가 이념의 바탕으로 발전하였다.

 

(3) 고려 초기

주자학 도입 이전의 고려 유학은 건국 초기에는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데 작용하는 동시에 왕도정치의 정신으로 발휘되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는 불교·유교·도교·토속신앙을 모두 조화시키고 있으나, 그 중 5개조에 걸쳐 유교적 정치 이념이 반영되어 있다. 광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은 유학이 고려에서 틀을 잡은 때였다. 유학 정전을 시험 과목으로 하는 과거제를 실시한 것이라든지 최승로(崔承老)가 「시무28조」를 올린 것 등은 유교적 정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고 유교적인 방식으로 국가의 체게를 정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4) 고려 중기

고려 중기에는 최충(崔沖)을 비롯한 사학 12도가 나와 유학 경전을 위주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그 후 사학이 쇠퇴하고 관학이 흥성하면서 예종, 인종, 의종 때에는 경전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유학적인 역사의식을 기초로 씌어진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등 학술 서적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유학은 사장학으로 기울면서 부화에 바져 의종 때 발생한 무신의 난과 함께 이윽고 침체에 빠지고 말았다.

 

(5) 고려 후기

고려 후기에 이르자 주자학이 수입되었다. 주자학은 고려 충렬왕 때에 원으로부터 안향(安珦)이 들여온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고려 말에는 불교의 말폐로 말미암아 사회가 혼란과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에서 새로운 학풍의 진작이 요구되었다.이후 백이정, 권부, 이색, 정몽주, 길재와 같은 뛰어난 유학자들이 연이어 나와 주자학을 발전시켰다. 주자학은 점차 고려 말 사대부들의 이념이 되었으며, 조선왕조가 개국하면서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 · 문화 · 정치 · 교육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2. 조선 주자학의 양상

(1) 새로운 이념의 요청

불교적 사유에 의해 주도되었던 고려사회는 말기에 이르러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의 사회적 위기, 사회적 모슨은 주로 귀족이나 고급관료, 지방의 호족들 그리고 사원들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던 땅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이러한 토지겸병의 확대, 즉 농장의 확대로 인해 국유지와 자영농 소유의 토지가 줄어들게 되자 국가의 재정은 궁핍해졌고, 국가 재정의 유실 부분이 양민에게 전가됨에 따라 양민의 조세 부담이 증가되어 자영농의 몰라, 유민의 발생, 농촌 경체의 파탄과 같은 현상이 잇달아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쪽은 역시 농민이었지만 같은 입장에 처한 또다른 계층이 있었다. 그들이 돈도 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중앙 관곙 진출하였던 신진사대부 들이다. 권세가들의 인사권 장악에 따라 그들에게는 신분상승의 기회가 거의 봉쇄되어 있었으며, 국유지의 축소에 따라 그들에게 주어져야 할 수조지도 제때에 분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신진사대부들은 당시 사회가 여러 문제점을 드러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불교에 있다고 보고, 낡은 사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이념체계를 요구하였고, 그들이 선택하였던 것은 주자학이었다.

 

(2) 주자학의 전래와 훈구파 유학사상

고려 말 주자학자들은 불교를 비판하고 유학을 숭상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새 왕조의 창업에 참여하는 세력과 구왕조를 중흥하려는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을 빚었다. 전자는 혁명론을 강조하고, 후자는 의리론을 주장하였다. 의리파의 대표적 인물이 정몽주와 길재이다. 그러나 조선 왕조 건국 이후 정몽주와 길재에게는 의리의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의리론의 흐름은 유학적 이념 집단인 사림파로 이어져 조서조 도학(道學)파, 의리학파의 정맥으로 굳어졌다. 그 반면 혁명론자인 정도전(鄭道傳)의 맥은 권근(權近)으로 이어져 조선 왕조 초기의 훈구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항을 미치게 되었다.

이는 그 당시 정치 상황에 맞추어 유학을 숭상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주자학적인 권근은 『입학도설(入學圖說)』 및 『시경천견록(詩經淺見錄)』 등의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지어 주자학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하였는데, 특히 『입학도설』은 조선 왕조 중기의 성리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조선 주자학의 발전

① 사림파의 등장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 유학자들은 조선 사회를 주자학적 질서로 재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 유학적 정치는 정치적 안정과 더불어 민생의 안정도 가져왔다. 특히 성종 때부터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파 유학자들은 주자학적 순수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도학(道學) 정치를 주장하였는데, 이 도학정치는 정몽주의 의리정신과 연결된다고 평가받고 있다. 정몽주의 의리정신은 사육신(조선시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북음을 당한 6명의 신하), 생육신(조선시대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관직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6명의 신하) 등의 행위로 나타났고, 이어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정치를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도학정치를 표방하는 사림파와 기존의 훈구세력 사이의 갈등은 수차례 사화(士禍)를 불러오지만, 사화기를 거치면서 유학은 오히려 사상적으로 성숙단계로 접어들 수 있었다.

② 조선 주자학의 성립
16세기 중반까지 계속된 사화는 사림파 유학자들을 다시 향촌으로 내몰았다. 학자 개인적으로는 불우한 시기를 맞이하였으나, 사상사적으로 보면 이 시기는 발전의 기회였다. 공직에서 자유로워진 학자들은 향촌에 은거하면서 주자학의 근본문제를 깊이 천작하였고, 자신의 시각으로 주자학을 재구성하여 주선 주자학의 이론 체계를 정립할 수 있었다.
서경덕(徐敬德)과 이언적(李彦迪)을 거쳐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에 이르러 주자학적 사유는 조선에 탄탄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인물들로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주자학은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는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 가치의 문제를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이이와 성혼(成渾) 간의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人心道心)에 관한 논쟁은 리기성정론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켰다. 이후 조선의 학계는 이황의 이론을 추종하는 영남학파, 즉 퇴계학파와 이이의 이론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즉 율곡학파의 논쟁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복잡하게 발전하였다. 또한 선조대를 기점으로 사림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들의 이론은 단지 ‘산림(山林)의 이론’이 아닌 ‘지배의 이론’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4) 예학의 발달

임진왜란과 변ㅇ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사회는 전 분야에서 병폐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집권층은 대동법과 호구조사, 양전을 실시하여 허물어져 가는 봉건 경제를 살리기 우해 노력하는 한편, 예(禮)의 회복을 통해 봉건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점에서 주자학의 예학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따라서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예학의 흥성은 양란 이후 흐트러진 사회질서를 바로 잡으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지만, 사회기반의 급속한 해체와 예학이 당쟁과 깊이 연관되면서 원래의 목적과 기능은 탈색된 채 당파와 학파 간에 극한적이고 소모적인 대립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사회를 지탱해 주던 주자학이 이미 그 생명력을 상실해감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선조대를 기점으로 중앙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을 지어 정치력을 행사하다가, 양란을 겪은 후 광해군 때에는 동인 가운데에서도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한 ‘북인’이 정권을 좌우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인은 광해군이 인륜의 부정을 저질렀다는 명분을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는데, 이것이 이른 바 인조반정(1623)이다. 이조반정은 서인계열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는 동시에, 정치 노석에서도 광해군의 실리주의 대신 주자학적 이념의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청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명에 대한 대의명분론을 내세운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인조반정 후 서인은 광해군을 뒷받침하던 북인을 몰아내고 그 대신 남인과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 색심세력이 되었다. 서인 세력은 남인을 파트너로 삼아 상호 견제를 유도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제한된 관직과 기득권은 이들의 연합 정권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들 사이의 대립과 투쟁은 필연적인 귀결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효종 사후에 일어난 예학논쟁과 예송은 이러한 대립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성의 마비를 불러왔으며, 결국에 가서는 상호견제를 통해 체제를 유지한다는 붕당정치의 공존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리하여 나타난 것이 서인단독정권의 창출이었다.

 

(5) 주자학의 절대화

단독으로 정권을 차지한 서인 내부에서도 남인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갈라지게 된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것은 경종과 영조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진 왕위 계승 시비 였다. 경종이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노론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은 이후 조선 후기싸지 정권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었다.

한편 소외된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 계층 일부는 민생의 안정을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로 삼고 실학을 표방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였고, 일부 소론 계열에서는 양명학을 받아들여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로서는 스스로 자신들의 사상을 제도할 만한 힘을 갖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노론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의 학자들은 주자학적 세계관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이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죄목을 씌워 이단으로 모는 중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 더 경직된 사상체계를 고착시켜 나갔다.

 

민족사상과 문화유산 (1) — 단군신화와 화랑도

민족사상과 문화유산 (2) — 토속신앙과 무속신앙

민족사상과 문화유산 (3) — 한국도교사상

민족사상과 문화유산 (4) — 한국불교사상

민족사상과 문화유산 (5) — 한국유교사상

민족사상과 문화유산 (6) — 한국실학사상

민족사상과 문화유산 (7) — 동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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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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