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상
1. 외교적 배경
유렵의 열강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남미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해 왔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1870년대 무렵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를 더 많이 차지하려고 식민지 분할 전쟁을 벌이며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의 막을 올렸다. 19세기 중엽 산업자봄이 독점자본으로 성장하면서 해외시작을 새척하려는 서구 열강들 사이의 각축은 더욱 치열해 지면서 식민지 침략의 손길이 이제 동아시아까지 뻗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말레이시아, 미얀마를 식민지화하고 1858년에는 인도 전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또 영국은 청과 아편전쟁을 벌여 청을 반(半) 식민지(1차: 홍콩식민지, 2차: 텐진조약)로 만들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어 홍콩을 넘겨주고 상하이·광저우 등 5개 항구를 개방하였다. 뒤이어 미국, 프랑스도 청과 불평등 조약을 맺어 치외법권을 인정받고 최혜국 대우를 보장받았다.
이 시기 한국 역시 서구 침입과 제국주의 열강들에 둘러싸여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과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 선포는 한국을 둘러싼 열강의 세력 판도와 국내 정치 역학 관계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때 일본 세력과 함께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등 열강이 진출하였으며, 이들 세력에 의존하여 정권을 유지하였던 대한제국 정부는 철도·광산·산림·전기 등의 이권을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문호 개방 이후 전개된 일련의 개화운동은 대한제국이 세계자본주의 체제와 연결되면서 외세의 정치적·경제적 침략이 가속화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더욱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그들의 침략 야욕은 더욱 노골화 되어 한국의 민족적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19세기 중엽의 서구 침입과 제국주의 정책은 우리 민족과 한국사회에 ‘민족적 위기’로 다가왔다. 이 위기는 당시 외부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압력으로서 선진 서양 열강의 도전적 동양 침입이 조성한 ‘민족적 위기’였다. 이 새로운 도전은 서학의 포교, 이양선의 해안 출몰, 외국 상선의 통상 요구,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상품들의 국내시장 출현, 서양 각국 정부와 일본의 개항 통상 요구, 자본주의 열강에 의한 종속국화·식민지화의 위협 등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도전은 한국사회와 한민족에게 종래의 폐쇄체계로부터 개방체계로의 전환 후 열강의 도전에 적절히 응전하여 처리하지 못하면 민존공동체 자체가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게 되는 매우 심각한 성격의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한국 민족과 한국사회에 대하여 ‘민족적 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우리의 저항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도학사상(道學思想)을 계승한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의 의병활동이며, 두 번째는 개화파의 사상과 인맥을 계승항 자강운동이었으며, 세 번째는 반봉건·반외세를 위치며 민중들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동학(東學)사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대한제국은 경술국치(庚戌國恥) 즉, 한일합방이 되었고, 강압적인 서구중심의 체제로 변하게 되었다.
2. 사회진화론
사회전화론은 넓은 의미로는 다윈(Charles Dawin, 1809~1882)의 진화론과 자연도태의 원칙을 인간사회에 적용한 이론을 가리키고, 좁은 의미의 사회진화론은 대체로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이론으로 집약되는데, 때로는 자연도태의 원칙이 진화의 개념보다 강조되어 국가 사이의 분쟁과 사회 내의 갈등관계를 설명하는 모델로 제시되기도 한다.
다윈의 생물진화론은 모든 생명체를 고유의 진화적 법칙성과 역사적 과정을 인과적이고 기계적인 모델로 설명하였다. 다윈 이론의 기본 테제는 진화론적 발전과 자연도태이며, 자연 세계는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한다. 생존경쟁으로 자연도태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모든 생명체는 자연도채를 통하여 유기적·무기적인 생활환경과의 관계를 개량시키고 진보한다고 보았다.
자연도태의 생물진화론을 인간사회에 적용시킨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과 헉슬리(Tomas Huxley, 1825~1895)의 사회진화론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로 확대된다. 인간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며, 사회적 불평등과 착취는 ‘자연의 법칙’이 되었다. 생존 경쟁은 인간 사회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등급화하여 인간과 인간사회의 평등을 부정하였다. 즉 사회진화론은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이론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인종적 불평등을 자연의 법칙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사회진화론은 생물진화의 자연법칙을 인간 사회에 적용시켰다는 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환경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이해는 곧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물질세계에 대한 어떠한 위대한 앎의 체계도 결국 삶의 궁극적 요청을 위배할 수 없다. 주자학에서의 자연은 가치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천리(天理)는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이면서 동시에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이다. 이 개념이 인간의 도덕규범에 대한 보편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역시 주자학에서 자연의 물리(物理)는 인간의 도덕세계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반면에 서구의 근대 과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한 실험과 관찰을 통해 획득된 자연에 관한 가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더욱이 인식주체와 상대하여 있는 자연사물은 인간의 생활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이용해야 할 수 단적 가치를 지닌다.
다윈의 생물진화른은 19세기의 과학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19세디의 과학주의란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일체의 현상을 비의인주의적(非擬人主義的) · 비초자연주의적(非超自然主義的) · 비목적론적(非目的論的) · 자연과학적(自然科學的)으로 통일해서 해석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중세적 자연관에서 벗어난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사회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생물진화론을 인간사회에 적용한 사회진화론은 사회와 국가 간의 경쟁 관계에까지 확대 해석되었다.
사회진화론은 사회적 다윈주의라고도 하는데, 종족과 사회집단의 투쟁을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만 파악하여 경쟁원리를 사회적 진화의 핵심요소로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집단 간의 경쟁이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경제적·군사적으로 강한 소수가 약한 다수를 지배하게 되는데 자유로운 경쟁을 자연도태의 한 형식으로 차악하는 사회진화론은 결국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옹호하였다. 그러나 가장 현실주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경향들은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일면적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 원리도 약육강식의 원리가 미화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침략논리로 작용하여 인종주의적 편견과 인종간의 대립을 강조하고 조선이 일본과 협력하여 백인종에 맞선 투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논리로 연결되면서 일지침략의 도구로 전용되었다.
3. 동학(東學)사상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배경이 된 동학의 등장은 전통 유학의 윤리 도덕이 타락하고 관리들의 학정과 수탈이 심해지는 한편, 천주교가 침투하고 서양열강의 침입이 거세어지는 등 내외적으로 위기의식이 높아지던 19세기 후반기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동학은 1860년에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시되고, 2대 교조 최시형(崔時亨)과 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 1905년 동학은 천도교로 개칭됨)를 중심으로 동학도들에 의해 발전한 민중적·민족적 성격을 띤 신흥 종교라 할 수 있다.(난학파: 후쿠다와 유키치→일본근대의 아버지 → 유길준(개화파: 일본에게 배워야 한다)) 조선 후기 개화파나 척사위정파들이 주로 지식인이나 양반층이었던 것과는 달리 대부분 민중이었다. 동학은 유교와 불교·도교는 물론 우리의 전통적인 민간신앙 요소까지 결합하여 만든 사상으로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사상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은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며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라든지 관존민비, 적서의 차별, 남존여비 등의 봉건적 신분차별을 부정하는 평등사상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아울러 동학은 천주교나 불교와는 달리 내세를 부정하는 현세 중심의 사상이며, 사람이 가장 신령스럽다는 주장에서 보이듯 인간 중심의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동학은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널리 민중을 구제하고, 온 세상에 덕을 베푼다’는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이를 더욱 확장시켜 ‘후천개벽’의 원리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동학도들은 현실사회에 팽배한 모순을 해결하는데 후세나 내세로 미루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동학은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고자 했으며 그와 같이 나온 사상을 사회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따라서 역사를 정확하게 인식했던 생동감 넘치는 많은 민중 동학도들에 의해서 그 한계가 극복되고 있었기에 근대 한국의 민중운동, 특히 동학농민전쟁에 사상적으로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4.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1894)
(1) 폐정개혁 12개조
①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 여러 가지 정사)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 숙청
③ 횡포한 부호 처벌 (사회주의적 요소)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 처벌
⑤ 노비문서 소각
⑥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⑦ 과부 재가 허락
⑧ 이름 없는 잡세 폐지
⑨ 인재 등용, 문벌 타파
⑩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⑪ 공사채(公社債) 면제
⑫ 토지 평균 분작
(2) 반봉건·반외세
동학농민전쟁은 동학사상은 물론, 자유나 평등과 같은 민주주의적인 사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고 있다. 외세 침략에 맞서 무장투쟁에 나섰던 농민군 지도자들과 민중들은 사상적으로 반드시 동학에만 근거한 것은 아니었으며, 시대와 사회의 상황 속에 뛰어들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직접 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역사를 인식해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동학농민전쟁은 반봉건 사상과 함께 근대 민주주의적 의식이 나타나며, 제국주의의 팽창에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대항하려는 반외세 사상이 탄탄히 자리하고 있음으로 알 수 있다.